“프로듀서가 집착해야 할 건 결국 시나리오 아닌가.”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 방에는 흔한 트로피 하나 없다. 대신 책과 수백권의 시나리오가 무슨 보물처럼 차곡차곡 쌓여져 있을 뿐이다. 기초체력을 끊임없이 체크하는 이 근심 많은 14년차 프로듀서가, 드디어 충무로 파워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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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
=올해가 열한 번째인가? 딱 열번만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부담이 확 생긴다. 투자나 배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1천만 영화를 해본 적도 없고. 내 평생 1등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충무로에서 몸무게는 1등이었을지 모르지만. 근데 1위 했다고 뭐 주는 건 없네. (웃음)
-만년 ‘넘버3’였을 때 마음은 편했나.
=산업에 있어 자본의 힘이 가장 좋은 법 아닌가. 영화산업 안에서 프로듀서 위치가 그만큼 올라갔고, 다른 분들이 그걸 중요하게 인식해준 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부담이다.
-어떤 부담인가.
=(한동안 생각하더니) 꼭대기 올라가면 하산밖에 더 있나. 회사 덩치가 커져서 아무래도 상업적인 성격의 영화들을 많이 해야 하는 터라 프로듀서로서의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동시에 후배 프로듀서들한테는 전범이 되어야 하니까.
-자본을 갖고 있지 않은 ‘영화공장 공장장’이 1위에 올랐다. 자본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반감의 표현일 수 있겠지. 그러니까 1등한 건 어부지리다. (웃음) 영화하는 사람들은 창작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자기 존재도 확인하고, 사회에 뭔가 참여해보고 싶은데. 그런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의 논리가 강해질수록 두려움도 커질 테니까.
-스스로에게도 그런 불안이 있나.
=지금까진 장생과 공길의 줄타기처럼 잘해온 것 같은데. (웃음) 스스로의 위치를 정할 수 없다는 게 광대의 운명 아닌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왕의 남자> 보면 부럽다.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충분히 창작자의 욕구를 담아내고, 또 사회적 의미도 담고 있고. 그런데 관객의 호응까지 받고, 또 중층적 코드를 품고 있어 그 호응 또한 다 다르니까.
-싸이더스FNH는 제작시스템이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많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텐데. 질적 퀄리티까지 담보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많이 만들면서 옛날만큼 공을 들일 수 있다면 거짓말이지. 내셔널 브랜드를 만들면서 명품만큼 공을 들일 순 없잖나. 어느 정도 균질된 영화들을 안정적이고 평균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기업화의 관건이다. 좋은 건 많이 만들다보면 제작방식이든 콘텐츠든 다양한 실험을 해볼 기회가 많아진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경우 인력 풀을 넓힘으로써 방송과 영화의 격벽을 허물고, 디지털과 필름의 기술적 격차를 줄인 케이스였다고 본다.
-<동아일보>의 최근 기사를 봤더니, 한 영화사 합병 건을 놓고 KT와 갈등이 있다고 하던데.
=사인하고 5개월 지났는데 요즘이야말로 해피하게 잘 지내고 있다. KT, KTF쪽 이야길 들어서 기사를 썼다던데, 차승재, 김미희를 거론하고 발언한 것처럼 썼으면 한번쯤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KT쪽은 어떤 영화를 하느냐에 일절 간섭이 없다. 다만 합병은 회사 경영과 관련된 문제다. 그 기사처럼 우리가 더 잘 아니까 믿고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는 파트너 사이라면 의사소통 과정은 필수다. 그걸 갈등이라고 써버리면 악의가 있다거나 무지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다른 영화사를 합병할 계획이 있나.
=없다. 영화계 안에서 세 싸움하고 싶지 않다. 좋은영화의 경우 양쪽의 결핍을 메워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거고. 다양한 레이어가 존재하는 스펙트럼의 구조가 아니라면, 비슷한 성향의 회사가 자꾸 뭉쳐서 커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배급은 언제 하나.
=때가 되면 한다. (웃음) 아직도 끊임없이 CJ쪽에 시나리오가 가고 있다. 앞으로 7편쯤 그쪽에서 배급한다.
-그때는 언제인가.
=체력도 없는데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1차 시기에서 맥없이 역기 내려놓고 싶지 않다. 100kg 들 수 있을 때 80 정도 들면 모양도 좋고, 몸에 무리도 없다. 회사 재정이나 운용 자금이 좀더 안정적일 필요가 있다.
-극장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갖는 우려인가.
=극장이 없는데 배급사업에 진출하려면 라인업이 강해야 한다. 품새는 뛰어나고, 리스크는 적은 영화들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착착착 내려놓을 정도가 돼야 한다. 1년쯤 블로킹당할 수 있다. 그걸 버틸 체력이 없으면 못한다. 1년 돈 안 벌어도 좋아,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극장도 좋은 영화 걸지 않으면 굶는 거니까.
-해외 프로젝트가 있나.
=펀딩 포함해서 일본쪽과 아시아 시장에서 유통가능한 영화들을 계속 준비 중이다. 중국은 뭘 하고 싶은데 당장 현금화가 안 되는 시장이니까 아직은 좀. 유럽이나 미국쪽에 어필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무슨 글로벌 프로젝트를 해서 할리우드 주류시장을 겨냥한다 그런 건 아니고. 파일럿영화처럼 물기를 재볼 수 있는 타진이 필요하다. 그 시장 안에서 아시아영화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 어떤 사이즈의 영화가 어떤 유통망을 탔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체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2개 정도 준비 중이다. 뭐든, 차근차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