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팬을 자처하는 동료 만화가와 영화인들에게 허영만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강풀(만화가) |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당거미>다. '무당거미' 이강토의 상대가 바뀔 때마다 시리즈가 종류별로 나왔는데, 그때마다 재밌었다. 대본소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내 기억 속 허영만 만화에는 엄청난 영웅이 없었다. 영웅이 등장해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좌절하고 힘들어했다. 그런 고민과 방황을 충분히 겪은 뒤에 이를 극복해내기 때문에 허영만의 주인공들을 보는 감동은 더욱 남달랐던 것 같다.
김용균(영화감독, <분홍신> <불꽃처럼 나비처럼>) ㅣ 허영만 만화에 김세영 작가가 기여한 부분이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김세영 작가의 반복되는 주제인데 그 결정판이, 내가 허영만 만화 최고작으로 꼽는 <오! 한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세영 작가가 다른 만화가에게 써준 작품이 완성도에 있어 허영만 만화만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허영만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작가 김세영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다양하고 폭넓게 아우르는 허영만의 연출력은 영화감독인 나에게 귀감이 된다.
박영석(산악인) ㅣ 지난 5월 있었던 에베레스트 횡단 원정대에서 허영만 화백은 정정당당히 대원으로 참가했다. 평소 술도 좋아하고, 술자리도 좋아하는 분이지만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일어나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늦은 산바람에도 불구하고 지구력, 순발력, 파워가 40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좋은 편이다. 원정 중에도 매사 후배 대원들 앞에서 솔선수범을 보여 왜 그가 정상의 자리에 그토록 오래 머물러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재동(만화가. 서울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학부 교수) | <오! 한강> <무당거미> <각시탈> 등 오래 전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중 베스트는 아무래도 <각시탈>이다. 대학생이던 청년시절 접한 <각시탈>은 민족적인 분노를 달래주고 청년의 의협심을 고취시켰다. 당시 만화계에서도 <각시탈>은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 시절 한국만화 환경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이 가득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허영만 만화의 맛은 길게 지속되는 쫄깃쫄깃한 맛이다. 허영만은 그 쫄깃쫄깃한 맛을 끊이지 않고 낸다. 그리고 허영만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재밌다’는 것이다. 읽어보지 않은 것은 몰라도 읽은 것은 다 재밌었다.
신재명(무술감독,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 등) ㅣ 허영만 만화는 무리수가 없고 부드럽게 읽힌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각시탈>인데 액션 연출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각시탈>은 무술과 싸움이 결을 달리 했던 시절 총과 검을 함께 쓰던 우리 고유의 무술을 발굴할 수 있고, 한국식 액션을 표출하기 좋은 원작이다. 영화로 다시 만들어지면 내가 꼭 해보고 싶다. 지금 내 머릿속엔 액션 콘티가 완벽하게 담겨 있다.
심산(심산스쿨 대표, 시나리오 작가 <비트> <태양은 없다>)ㅣ 나는 허영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베스트 드레서'이다. 그 정도 연배의 남자가 그 정도 스타일의 옷을 소화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1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해진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요즘엔 산에 너무 빠지셔서 옷이라고는 온통 등산복뿐이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옷을 걸치는 안목은 곧 삶을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즈음의 그를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간다. 이른바 '허영만식' 삶의 방식이다. 그토록 매력적인 사람과 동시대를 살고 있고,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고, 이따금씩 마주 앉아 소주잔도 기울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원재(시나리오 작가 <혈의 누> <짝패>)ㅣ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는데 일본 로봇만화는 슈퍼 로봇 계열과 리얼 로봇 계열이 있다. 슈퍼 로봇의 대표 캐릭터가 마징가라면 리얼 로봇의 대표 캐릭터는 건담이다. 내게는 이현세 만화가 슈퍼 로봇 계열이라면, 허영만 만화는 리얼 로봇 계열로 보인다. 허영만 만화는 작품이나 장르를 막론하고 최소한의 리얼리티를 갖고 있어 막판에 가서 실망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왜곡이나 과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고집 있게 리얼리티를 고수하는 부분이 간혹 이현세 만화의 만화적 과장에 실망한 나로서는 매우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윤수(영화감독 <베사메무초>) | 어린 시절 허영만 만화를 보고 자랐다. 그 시절 허영만 만화를 보며 늘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식객>을 연출하게 되다니, 참 신기한 기분이다. 가장 좋아했던 건 허영만의 첫 히트작 <각시탈>이다. 그 이후로 줄곧 허영만 만화가 지녀온 매력은 만화에 깔린 휴머니즘, 그리고 영화로 만들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드는 흡입력이다.
조민환(나비픽처스 대표, <비트> 프로듀서) ㅣ 정말 단단한 분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우상이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면 선생이라는 호칭이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성찰이 오늘을 있게 했다. 지금 <각시탈>을 TV 시리즈와 영화로 제작하려 준비 중인데 어떤 최고의 감독을 붙여야 하나 목하 고민 중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각시탈>은 나라와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최동훈(영화감독 <범죄의 재구성> <타짜>) | 최고의 허영만 만화는 <각시탈>이다. 감독이라면 누구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어지는 만화다. <각시탈>엔 뭔가 클래식한 게 있다. 일종의 조로 이야기지만 굉장히 한국적이다. 허영만 만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만화가 무척 재밌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재밌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엄청난 취재에 있는 듯하다. 취재가 바탕이 된 허영만의 이야기는 그래서 무척 심상찮다. 그의 만화 주인공들의 고독과 외로움도 다른 만화 주인공들과 다르게 클래식하다. 그와 동시에 거의 모든 허영만 만화는 고독한 청춘의 오디세이로 귀결된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허영만 본인이 굉장히 건강하고 낭만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허영만 선생님처럼 늙고 싶다.
[필름2.0] 2006년 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