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칭이라는 기술 혹은 예술에 대하여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필름마켓 시나리오 피칭
2006년 10월 15일,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2층 카프리룸
Kofic Supporting Project in PUSAN 2006
피칭(pitching)이란 시나리오작가가 감독 혹은 제작자 혹은 투자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말로써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하는 것을 뜻합니다. 혹시 영화 속에서 그런 장면 보신 기억이 있습니까? 제작자가 거만한 자세로 시거를 피우면서, 회전의자에 앉아 핑그르르 돌면서, 반짝이는 구두 신은 두 발을 책상 위에 턱 포개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래,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긴지 5분 안에 떠들어 봐!” 그게 바로 피칭입니다. 시나리오작가라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기회’죠. 그 5분 안에 자신의 작품을 가장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결국에는 팔아넘겨야 하니까요(피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저의 졸저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대적인 피칭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행사로 치루어졌던 ‘KOFIC 지원 프로젝트 설명회’(2006년 10월 15일 오전-오후,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2층 카프리룸)였지요. 저는 제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www.scenariomarket.or.kr)'에서 상반기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시나리오들을 ‘세일즈’하기 위해 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이 행사가 없었더라면 아마 올해도 부산영화제에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가봤자, 영화는 한편도 못보고, 술에 떡이 되어 뻗어버릴 게 뻔하니까요. 이번에도 역시 영화는 못보고 술에 떡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행사가 있어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앞으로도 지속될 행사이고 특히 시나리오작가들이라면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될 분야이니 그 과정에 대하여 조금 설명해 보지요. 이번 행사에서는 모두 14편의 시나리오작품이 피칭되었습니다. 첫 번째 범주는 한국계 외국인(동포) 영화감독을 위해서 마련된 ‘Kofic Filmmakers Development Lab Project'에서 선정된 5편의 시나리오들, 두 번째 범주는 ‘재외동포 시나리오공모 프로젝트’에서 선정된 3편의 시나리오들, 세 번째 범주는 ‘재외동포 저예산제작지원 프로젝트’에서 선정된 2편의 시나리오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범주는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프로젝트’에서 선정된 4편의 시나리오들, 이렇게 해서 모두 14편에 달하는 시나리오의 피칭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이외의 프로젝트에서 피칭된 작품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필름메이커스 랩의 [The 38th Parallel]과 재외동포 시나리오공모 프로젝트의 [춘자사건]이었습니다. [The 38th Parallel]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작품을 피칭한 작가 겸 감독 Mora Mi-Ok Stephens가 지독한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Wow, 정말 단 한 순간도 눈길을 뗄 수 없는 대단한 미인이더군요.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나와 대단히 인상적인 자세로 피칭을 하면서 중간 중간 긴 머리를 쓸어내리는 멋진 동작들도 연출하여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미모도 재능의 일부(!)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너무 농담처럼 보일까봐 덧붙이건대, 그녀는 이미 「Conventioneers]라는 작품으로 2006 플로리다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았고, 유명한 잡지 「Vanity Fair]를 통해 “인디펜던트의 미래”로 소개될 만큼 재능이 넘치고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입니다).
[춘자사건]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피칭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춘자사건]의 한승억 작가는 장내를 가득 채운 모든 사람들의 숨을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한 살 때 버림 받아 미국으로 입양되어온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이 싫고 한국인이 싫고 한국말이 싫었습니다. 그런 제가 자신의 아이를 전자오븐에 구워서 죽인 춘자(실제의 사건입니다)의 정신분석을 의뢰 받게 되다니...너무 끔찍했던 경험입니다. 저는 그 여자가 혐오스럽고 두려웠습니다...” 한승억 작가는 피칭 도중 목이 메어 울먹였고 우리는 모두 홀린 사람들처럼 그의 피칭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하지만...위의 피칭 내용들 중에서 ‘저’라는 1인칭은 한승억 작가가 아니라 [춘자사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캐릭터(!)였습니다. 참으로 절묘한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것이죠. 이것은 ‘반칙’인가요? 일종의 ‘사기’인가요? 아닙니다. 잘 고안되고 훈련된 피칭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img2]피칭은 기술이자 예술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서 제가 새삼 확인한 사실은 이겁니다. 피칭은 반복과 훈련을 통하여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인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파악할 수도 있는 ‘예술’입니다. 피칭은 어느 날 갑자기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 프로젝트 선정 작가들의 경우, 하루 전날 밤에 리허설을 해보고, 서로 토론을 하여 그 내용과 형식을 바로 잡고, 새벽이 밝아오도록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한 다음 ‘무대’ 위로 올라섰습니다. [조선땅 만주]의 김은섭 작가, [야생양잠누에]의 이정선 작가, [신작로 개통식 사건]의 이승환 작가, [서라벌식 연애]의 김태완 작가...모두들 생전 처음 해보는 짓(!)이라 무척이나 떨렸을 텐데도 아주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더 해보라고 그러면 좀 더 잘할 수 있을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의 시나리오 피칭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멍석을 깔아준 부산국제영화제와 영화진흥위원회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이 행사는 지속될 것이고, 그때는 마켓당선작가들뿐만 아니라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의 작가들도 참여할 것입니다. 올해는 처음 갖는 행사여서 감독이나 제작자들의 참석이 부진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들도 이런 자리를 찾을 겁니다. 온라인 시장은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이 만들어가고, 오프라인 시장은 이런 종류의 피칭행사가 만들어가게 될 겁니다. 올해의 부산영화제는 그 단초를 제공한 행사로 기록될 겁니다. 그 행사를 깔끔하게 치루어낼 수 있게 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글을 마무리지으며 붙이는 몇 가지 사족들. 재외동포 시나리오공모의 심사위원은 저와 김대우 작가 그리고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였습니다. 심사를 마친 다음 그 작가들이 몹시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즐거웠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배연석 작가, [춘자사건]의 한승억 작가, [북소리]의 김은자 작가, 모두들 반가왔습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Kofic Filmmakers Development Lab Project'는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의 비슷한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했다고 합니다. 행사의 말미에 제가 안정숙 위원장님께 공식적으로 여쭤보았습니다. “시나리오작가들을 위한 디벨로프먼트 랩을 시행할 계획은 없나요?” 안위원장님은 즉석에서 확답을 주셨습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Wow,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몇 명의 시나리오작가를 선발하여, 그들을 기성작가와 연결시킨 다음, 함께 시나리오를 발전시켜 나가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는 뜻입니다. 선정된 작가를 fellow라고 하고, 지도할 작가를 mentor라고 합니다. 그들끼리 일정한 장소에서 며칠 간 합숙을 하며 1대1로 맞붙어 앉아 시나리오를 발전시켜 나가는 거지요. 참으로 멋진 프로젝트 아닌가요? 참고로 ‘Kofic Filmmakers Development Lab Project'의 경우 하와이에서 1주일 간 진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나리오작가들도 작품을 완성하러 하와이에 갈 수 있게 된 건가요? 혹시 부곡 하와이는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