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2시 40분,
스물스물 심산스쿨에 기어든다.
익숙하게 유저리스트를 클릭한다.
이상하다.
정겨운 이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화려하게 클릭질을 해대던 최강 SM 밤귀신 군단이 전멸이라니.
모두들, 여느 때보다 빡샜던 산행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배낭처럼 매달린 피로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온 몸을 염전으로 만든 소금기를 씻어내고,
SM을 들러 계산 없는 댓글놀이로
가슴 벅찼던 하루 산행에 마침표를 찍고는,
지금쯤 무색 달콤한 잠에 취해
자신이 밤귀신 군단의 일원이었음을
하루쯤은 까맣게 잊고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를 터였다.
어쩌면
뿌듯함을 베개 삼고, 추억을 이불삼아
자신은 기억하지도 못할 예어로
놀란 근육들을 어르고 달래며
고된 산행 중간 중간을 흐뭇함에 젖게 했던 음식들 여운에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조용히 산행 식구들의 잠자리로 날아들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지친 다리를 주무르고,
상처 난 부위에 호호 입김을 불어주고는,
살갑게 북한산 지도가 그려진 담요를 덮어주고 돌아선다.
덮인 이불이 아니라 깔린 이불에 지도가 그려져 있거나 축축해도 놀라지 말라.
뒤척이다 내가 덮어준 이불이 떨어졌을 뿐이며
북한산에는 생명을 머금은 계곡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을 뿐이니.
그래, 나도 이제 한 숨 돌리자.
들어서자마자 이형돈의 <소비자 고발>과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때렸더니
오늘 산행이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
컴퓨터에 디카를 연결하고 깊은 숨을 쉬며 의자에 기대본다.
190여장에 이르는 사진의 압박이 대단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밤을 새다시피 하고는
지하철에 채찍질을 해대는 기분으로 당도한 1차 집결지부터?
아니면, 오늘의 주요 산행코스를 점검하던 상명대 정문 2차 집결지부터?
그렇다. 오늘 산행을 함께 했던 멤버들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언제나 사람이 먼저니까.
먼저, 오늘 산행의 포토제닉
심산과 한숙(오늘은 일단 두 분만 먼저 씁니다)이야기를 해야겠다.
영원한 등반 대장 심산!
그는 늪이다.
특유의 입담과 기이한 경험,
솔직담백하고 정확한 전달력,,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와
별 불만 없이 낄낄거리며 긍정하게 만드는 갈굼의 미학,
사유하되 실천하는 철학적 깊이,
혼을 쏙 빼놓는 놂과 배움에의 기획력.
때문에 어떻게든 그와 인연이 닿으면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그는 분명!
기꺼이 풍덩 빠지고픈 늪이다.
한숙!
그녀는 네 아이의 엄마다.
화려했던 등반 경력에도 소탈하기만 한 미소,
자신의 등산화 끈에 걸려 세 번이나 넘어졌다는 데도
전혀 웃기게 들리지 않는 진지함의 포스,
이마와 양 무릎을 거즈로 기우고도
부상투혼을 발휘하는 강인한 정신력,
맡은 음식인 초콜릿 때문에라도 와야 했다던 사려 깊은 책임감.
그 모든 장점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네 아이의 엄마라는 명함 하나 만으로도 까무잡잡한 발이 눈부신
그녀는 분명!
기꺼이 함께 등반하고픈 동료다.
(이름이 빠졌다고 서운해 말라. 인물 후기는 당분간 계속 된다. 쭈욱~~.)
우리의 등산은 좀 늦은 11시쯤부터 시작되었다.
심통 난 소년처럼 퉁퉁 불어있는 날씨가 심상찮다.
가방 속에 챙긴 방수 자켓과 우산을 생각한다.
한편으로 우중산행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상명대에서 출발하여 탕춘대 능선을 따라 산보하듯 걷는다.
산들바람이 콧등을 간지럽힌다.
배낭도 매지 않은 채 가볍게 운동복 차림으로 거니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황혼의 새벽을 즐기고 내려오는 노부부도 보인다.
향호(존칭생략. 송향호, 신화반 1기)가 꽃과 풀과 버섯과
사람들의 소소한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공터가 나오면 잠시 쉬었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탐방로를 오른다.
숨이 가빠온다. 전날 잠 좀 자둘걸.
뒤 늦은 후회가 밀려든다.
한 순간 시야가 트이며 산 아래 600년 도읍지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인천도 보인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림이다.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진다.
예전 경험자들에게는 아슬아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던
입산 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향로봉을 우회하고
비봉으로 향하는 능선으로 접어든다.
비봉으로 향하던 능선 어느 지점에서
용기있거나 무모한 사람들(산, 숙, 현옥, 진구, 희태, 기호, 권록, 경오)은
익스트림 크라이밍을 시작하며 운을 시험하고,
현명거나 소심한 사람들(미영, 인란, 향호, 월명, 영희)은 우회로로 택하면서
여유있는 발걸음을 옮긴다.
잠깐 동안의 이별이다.
그러나, 이 잠깐 동안의 이별이 영원한 긴 이별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산 교육은 커녕 정규산행도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던 초보자들은
발 디딜 데 없는 까마득한 절벽에 매달려 가슴을 졸인다.
나아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요부의 속살 같은 바위의 치명적인 유혹 앞에서
인생에 대한 짧은 후회와 연민이 스친다.
블라인드 바위를 발견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비된 산행을 위한 혹독한 훈련을 다짐한다.
13명이 모두 모여 점심을 먹기 위해 비봉으로 향한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자리 비봉.
앞선 사람들이 길을 트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호위하며 비봉에 오른다.
다리를 달달 떨며 불안해 하던 미영(신미영. 와인반1기)이
북바위를 힘차게 두드리며 비봉에 오른다.
자리를 잡고 앉자,
젊음과도 같은 여름의 끝자락이 우리를 맞는다.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준 우리에게 한낮의 태양과 구슬땀을 선물 한다.
입에 넣기도 황송한 점심을 먹고,
와인을 마시며 잠깐 동안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다시 승가봉을 거쳐 문수봉으로 향한다.
세상의 어떤 언어와 사진으로도 이 아름다움을 남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걷는 것인지, 산이 요람을 흔들며 실어 나르는 것인지 분간할 재간도 없다.
문수봉에 이르는 길은 난간이 만들어져 있어 등산의 편의를 도왔지만
그냥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문수봉에 올라 남은 간식을 먹고,
서울을 둥글게 감싼 한강과 저 멀리 서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찬탄을 금치 못한다.
산(심산. 심산스쿨 대표)이가 펄쩍펄쩍 뛰어
추억의 사진을 찍는다.
가을이 수줍게 마중을 나왔다.
땀이 식으며 한기가 밀려들어 웃옷을 꺼내 입는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문수봉 근방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문수사를 거쳐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북한산을 내려오며
다시 한 번 품에 안아주고, 덤블링을 시켜주고, 헹가래를 쳐 준 북한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 본다.
여름이 늠름하게 손 흔들고 있다.
그 뒤로, 가을이 수줍게 뒤따르고 있다.
'여름아, 그 동안 고마웠다.'
짧지만 굵은 눈인사를 건넨다.
'가을아, 이제는 노골적으로 유혹해도 좋다.'
가을이 좋아서 나뭇잎을 흔든다.
관능적인 가을의 붉은 다홍치마에 안길 날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