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었다. SM에서 향로봉이 ‘부모님 가슴봉’ 으로 불릴 만큼 그 봉우리는 만만치 않다는 걸.
원래, 나같이 들떨어진 아그들에겐 ‘하지마!’ 란 말은 [사탕보다 달콤한 유혹]인 법이다. 때문에 향로봉을 우회한다는 안타까움에 젖어 있다가 “여기로라도 가볼까?” 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년에 평균 5~6 명이 죽는 험준한 봉우리기에 등반로를 막아놓았고, 선생님께서 가리키신 코스는 모두가 초등인 ‘미개척지’ 라는 사실 같은 건 아랑곳 없었다. 경오오빠의 “어? 작년엔 하나 죽었네? 그럼 올해는 아무도 안 죽겠네?”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갑자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다쳐도 된다. 심한 상처가 생기거나 어디 부러진 듯 어떠랴? 또 하나의 경험이 축적되는 것인데... 몸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생동하고 움직이며 도전하는 때이다. 두뇌를 뒷받침해주는 오묘한 신경체계와 빠릿한 근육은, 정신과 육체라는 상부구조와 하위구조가 결집된, 인간이란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 그렇다. 여성의 몸이라고 해서 섹스 자판기나, 전시용 화초가 되란 법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심산 선생님을 선두로, 나, 기호씨, 진구오빠, 경오오빠, 권록오빠, 숙이언니가 뒤를 따랐다. 아슬아슬한 곳을 몇 번이나 지났다. 하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진구오빠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귀찮을만큼 신나게 씩씩거리며 기고 올랐다.
맨 처음 투덜거렸던 곳은, 커브가 진 바위에서였다. 바위 하나 씨근덕대며 오르고 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계셨던 산이 선생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
“어? 어디로 가셨지?”
고개를 들어 전방위를 살펴보니 눈앞에 큰바위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게 아닌가? 사람만한 바위라 이곳을 직방으로 오르셨을 리는 없다. 분명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셨을꺼다. 그런데... 그 오른쪽 커브 녀석 생겨먹은 꼬락서니가 가관이다. 가로막은 바위 오른쪽 끝은 역삼각형 모양으로 위가 더 튀어 나와 있고 바로 밑에 발 디딜 곳은 불과 40cm 가량. 손으로 잡을 곳도 없다. 바위끝이 디딜곳보다 더 튀어 나와 있다. 결국 몸을 구부린 상태에서, 두 아름으로도 해결이 안되는, 더우기 딱히 잡을 곳도 없는 밋밋한 바위를 어떻게든 부여잡고 몸을 휙~ 돌려 전혀 보이지 않는 바위 뒤로 몸을 던져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런 곳을 '블라인드 코너' 라고 한단다.
“뭐야! 이걸 어떻게 가? 이게 뭐야?”
“바위를 잡고, 몸을 밖으로 빼서 돌려!”
어떻게 몸을 밖으로 빼란 말인가! 바위라고 있는 놈은 무게를 싣는 순간 휘까닥 미끄러질 만큼 밋밋하고 바로 밑이 바위투성이 캄캄 낭떠러지인데...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가 앙다물려 질만큼의 긴장을 몇 마디 투덜거림으로 완화시키곤 그냥 믿어보기로 했다. 단지 선생님의 경험과 능력이 믿어졌다는 말 밖에는 못 하겠다. 게다가 이미 기호씨도 갔다. 그러니 ‘산이 선생님’ 이 아닌, ‘사람’ 이 갈 수 있는 데다. 그럼 됐다! 될 수 있는 한, 힘껏 바위를 잡고, 될 수 있는 한, 몸을 편 상태에서 획 돌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입다 메다 꽂으니 선생님께서 버티고 계셨다.
충만한 기쁨이 몰려왔다. ‘해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이다.
밤을 꼴딱 세우시고서도 깎아지른 듯한 바위를 평지마냥 날아다니시는 (정말 날아다니셨다.ㅡ_ㅡ) 산이 선생님은 마치 무게없는 스파이더맨 같았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긴장을, 즐거운 투덜거림으로 간신히 진정시키며 얼마간 올랐을 무렵...
산이 선생님께서 또 없어지셨다.......! ㅡ_ㅡ
아까보다 더 큰 바위가 또 버티고 있다. 웃긴 건 이젠 그나마 우회할 커브도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산이 선생님께선 바위 저 위에 오도카니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계신다. 그 큰 바위벽을 그냥 날로 오르신 거다. 잡을 곳이나 디딜 곳이 있다면 무엇이 문제랴! 나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그런데 이노무 바위에 그나마 있는 부감이란게, 제일 넓은게 기껏해야 1.5cm 정도다. 산이 선생님께서 위에 떡하니 앉아 계시지 않았다면, 사람이 이 골때리는 바위를 오를 수 있다는 걸 누가 믿겠냔 말이다.
딱 볼 때부터 알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도 난코스라는 생각에, 특히 나 때문에 저렇게 자리펴고 계시다는 걸. 하지만 커브를 돌면서조차 미련하게 샘솟던, 선생님에 대한 믿음따윈 간 곳이 없다.
‘아! 선생님께선 나같은 초짜가 이런데에 못 오른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거야! 맨날 등산학교에서 줄 메고 쇠 꽂고 초짜들 데려가 보셨지, 이런 날벽을 아무 연장도 없는 상태에서 데려가 보시진 않으신거야! 내가 평상시에 좀 겁 없이 잘 다녔다고 날 너무 믿으시는 거야! 내가 얼마나 겁 많은 인간인 줄 모르시는 거야!’.......... 불과 1,2초 사이에 든 생각이다.
그러나 어쩌랴! 안 오르고 아까의 모든 험준한 바위벽으로 내려간다면 100% 죽고, 차라리 오르면 80%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나 있냔 말이다. 확률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지만 생사의 가름길에서는 다른 문제다. 우선 첫 발을 디디고 손끝을 틈새에 세우고 간신히 반쯤 올라갔다.
그런데, 정말.... 더 이상 잡을 곳, 디딜 곳이 없는 거다. 밑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그것도 이미 큰 바위에 반쯤 올라온 기괴한 형국이다. 이젠 죽지 않으려면 올라야하고 잡을 곳이 없으면 머리로라도 깨서 만들어야할 형편이다.
바로 그때, 패닉 상태에 빠졌다. 선생님께서 잡고 딛고 올라오라고 하신 모든 패인 곳은 불과 1cm너비를 간신히 넘을까말까 하는데, 그냥 마음에서부터 “불가능해!!” 라고 외치고 있는 거다. 선생님께서 아무리 발끝으로 디디라고 하셔도 발끝으로 몇 번 무게를 옮겨보니 전혀 무게가 실리지 않아 옆으로 디뎠는데 계속 조금씩 미끄러진다. 그나마 디딘 곳도 1.5cm가 안된다. 손, 발에 힘이 쫘악 빠지면서, '여기서 죽는구나! 아직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개죽음을 당하는 구나! 아! 어쩌나! 죽는 건 상관없는데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다!' 이런 생각만 든다.
“선생님, 절대 못 가겠어요. 줄 같은 거 없으세요?”
“없어. 아침에 챙겨넣었는데, 설마하며 뺐어.”
“선생님, 진짜 못 가겠어요. 정말 안돼요. 진짜에요.”
이미 머리와 마음의 대부분의 공간엔 ‘삐요~삐요~ 경고! 경고! 죽을 가능성 많음!!!’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다. 팔 다리엔 점점 더 힘이 빠진다. 발은 미끄러지다가 다시 디뎠다가를 반복하고 그나마 더 이상은 그 짓도 못할 것 같다.
이 때 버틸 수 있었던건 오직, 위에 노련하신 산이 선생님이 계시고 밑엔 씩씩하고 강해 보이는 기호씨가 굳건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짜피 내가 떨어지면 기호씨도 잡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귀중한, 실날같은 희망으로 다가오긴 또 처음이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방을 풀어 내려주시는 묘안을 생각해 내시지 않았다면 난 오늘쯤 신문에 등장하는 영광을 안았을 것이다. (떨어져 죽었어도 선생님께선 모른척하며 다른 사람과 떠났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누가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어제 실리기는 좀 힘들었을 것 같다.)
가방하나가, 그나마 왜소하신 선생님의 팔 힘이 그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마구, ‘아! 이젠 살았다!’ 라는 기쁨이 샘솟으면서, 전혀 망설임 없이 가방끈에 몸을 맡기곤 재빠르게 올라버렸다.
갑자기 세상이 다시 보인다. 몇 분전 세상과 지금 세상이 다르다. 나 또한 몇 분전의 내가 아니다.
“잘 올라왔어. 그런데 나도 여기가 초등이라, 앞으로 또 뭐가 있을지 몰라.”
..........................
아 !!!!!!!
아 !!!!!!!!!!!!!!!!!!!!!!!!
이게 방금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할 소리냔 말이다! (반말 죄송)
“몰라요. 이런데 또 나오면 전 진짜 헬리콥터 올 때까지 절대 안 움직여욧!”
이미 심장은 혼자 꽹과리며 북이며 동원해서 난리뽁짝 사물놀이를 하고 있고, 팔 다리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데 가긴 어딜 가냔 말이다.
감사한다...... 그게 난코스 끝이였다.....TT 이후로는 무리없이 향로봉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 등산화가 워킹용이지 암벽등반용이 아니고, 또 등산화가 내 발에 비해 너무 커서 발 끝이 2.5cm가량 비는 바람에 무게를 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선생님께서 연습하라고 하신 바위를 죽어라고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경오 오빠왈: “내가 가만히 보니까, 너 등산화가 좀 크네?”
하지만, 무게를 실을 수 있었어도 그곳을 혼자 힘으로 올랐을 리 없다. 선생님과 기호씨가 없었다면 백중구십구는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환장하겠는건, 매달려 있는 순간에는, ‘다신 이런데 오나봐라. 내가 미쳤다고 여길 왜 왔지? 건방져. 건방져서 그래. 조현옥! 건방떨다 죽는구나!’ 하다가, 다 오르고 나니,
‘내가 왜 이 나이 처 먹도록 등산학교를 안가고 이 꼴을 당했을까? 왜, 병$같이 선생님께서 앞쪽에 무게를 실으라고 하면 실을 것이지 못 싣고 그랬을까? 거기까지 갔으면 차라리 제대로 해야 살지 말야. 죽으려고 발발 떨고! 말도 안 듣고! 진짜!!’ 라고 바뀌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 미친거다. 죽다가 살아났으면 착실하지 못한 목숨이나마 붙어있는 것에 감사하고, 무슨 부흥회에서 간증을 하던지, 앞으로의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 ‘한국을 빛낸 101명의 위인들’ 속에 들어가던지 해야지 왠 등산학교냔 말이다.
‘내 이노무 산 다시는 오르나 봐라!’ 해야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발에 딱 맞는 암벽용 등산화를 사야겠다.’ 라는 생각을 대체 왜 하냔 말이다.
바위를 다시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켜야지, 왜 진구 오빠가 올린 ‘숨은 바위’ 사진을 보고 가슴이 두근 거리냔 말이다.
희멀건하고 깨끗해서 '온실안의 화초' 처럼 보여야하는 여자 몸에 여기저기 형이상적 조각을 했으면 '어머! 난 몰라! 죽어버릴꺼야!' 해야지 왜, '이만큼만 다치고 살아났으니, 정말 다행이야.하하^0^' ..........ㅡ_ㅡ..... 이게 '여성몸의 타자화' 시대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세냔 말이다.
“내가 그런데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데려갔어. 나도 초등이라 그런곳인 줄 몰랐어. 출입 금지된 코스보다 훨씬 위험하던데?” 라는 선생님 말씀에 "잘코사니다! 반성 좀 하세요! 오늘 저 죽었으면 은이한테 쫓겨나셨어요! (은이가 오늘 진짜로 그랬다. 사실 더 심한 말을 했는데, 선생님 가슴에 멍들까봐 차마 옮기지는 못하겠다.ㅋㅋㅋ)" 해야지 왜,
“선생님, 기호씨! 정말 감사해요. 제 생명의 은인이예요.”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냔 말이다.
숨은 바위에 오르고 싶어서 미치겠다.
짜릿한 흥분에 노출되어서 미치겠다.
무기력하게 바위에 유혹되어 미치겠다.
무엇보다...... 내가 미쳐서 미치겠다!!!
어쨌든 이로써, 이제 아무도 더 이상 SM클럽에는 얼씬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