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동안을 ‘하루 날새고 다음날 5시간쯤 자고’를 반복했습니다. 산행전날 마지막 과외가 인란 언니의 맏딸인 고3 함상이었습니다. 함상이가 굉장히 웃긴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더군요. 산행날이 인란언니 생신인데, 제가 인란언니에게 산쌤 미역국을 끓여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순간 가뜩찮이 뿌옇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습니다. ‘실례도 이런 실례가 있나!’
그 순간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래 준비하려 했던 샐러드를 무쌈으로 변경하고 허겁지겁 장을 봐가지고 집에 가니, 이미 11시 반. 너무나 피곤해서 30분여를 커피마시며 정신을 차리곤 무쌈을 준비하니 이미 2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마음은 즐겁기 그지 없습니다.
산행동무들이 얼마나 정겹게 느껴지는가 이미 서술한 바 있습니다. 산이 선생님과 인란 언니는 우리에게 또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 입니까!^0^ 그래서 무쌈을 준비하는 시간들이 피곤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요리도 못하고 돈도 없고, 기운도 없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게다가 함상이가 제 시간에 가르쳐 줬으니 망정이지, 수퍼가 문 닫을 시간에 가르쳐 줬다면 정말 암담했을 껍니다.
아침엔 알람을 맞춰놓은 대로 제 시간에 이를 악물고 일어났는데도 계속 뻘 짓의 연속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뻘짓 인생인데, 잠을 못 자면 두뇌가 그나마 10%도 활성화되지 않는 ‘아메바’가 됩니다. 때문에 월요일 아침시간에 버스를 타고 종로에 가려는 미련한 짓을 했고 결과적으로 20분을 늦어버렸습니다. ㅡㅡ; 중간에 택시로 바꿔 탔더니 오히려 그 때부턴 버스가 더 빠른 겁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를 마음속으로 계속 반복하며 버텼습니다.
당연히 선생님께 목 한 번 졸린후, 경오 오빠의 궁시렁 세례를 원동력 삼아 산에 올랐습니다. 길을 잘못 든 숙이 언니가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둔한 머리는 곧 기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지송...TT)
가다가 민둥 눈썹 성근 형님을 뵈었지만, 얼굴이 커서 좀 신기했을 뿐 너무나 멋있는 산의 굽이굽이에 넋이 팔려 별로 한 눈 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바위에 신나게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5.10 전도사로서의 보람으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아! 인수봉!
인수봉과 숨은벽이 나타난 초입의 경관은 숨이 턱 막히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위와 나무, 하늘의 황금 비율. 비온 뒤 남아있는 물기에 반사되는 찬란한 빛들. 하늘과 땅, 그 경계의 관장자인듯 신비롭고 도도하게 버티고 선 인수봉, 인디언 전사의 흉터처럼 바위에 아로새겨진 부감들. 간간히 보이는 시절을 좆는 단풍들... 갑자기 몸이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가 싫을 지경이었습니다.
인수봉 북벽이 지닌 극한의 아름다움을 보고 산이 선생님께서는 예의하시는 감탄사를 연발하셨습니다.
“차~암! 좆같다!”
선생님께서는 왜 멋진 바위만 보면 이렇게 욕을 해 대시는지... 너무 아름다워서 욕밖에 안 나오시나 봅니다. 하지만 불초 제자, 글 쓰시는 스승에게 욕 말고 다른 형용을 생각해 내시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날 보았던 인수봉, 숨은벽, 노적봉에서의 장관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아니, 갔다온 뒤 계속 순간순간 무턱대고 떠 오릅니다. 그 때문에 그 충만했던 행복함이 아직도 가시질 않습니다.^^
그 때 또 사람들은 왜 그리 예뻐 보이던지... 그저 바라만 봐도 다 제가 키운 자식인냥(!)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사람과 산을 바라보며 벅찬 맘으로 미소 짓고 있다 어느 찰나 느낀 겁니다. 그 날 산에는 숨 막히는 장관과 이 사람들만 존재했습니다. 제가 없었습니다. 마치 우주속을 유영하는 듯, 제 몸뚱아리의 존재감도 사라졌고, 신기한 건 제 자아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산이 마냥 좋고, 눈 앞의 사람들이 마냥 좋았습니다. 그 상태 그대로 에코가 되어 날아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았구나.’ 반성이 됩니다.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아직도 너무나 많았구나...' 뒷목을 빳빳하게 하는 놈도, 울컥 화가 치밀게 하는 놈도,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놈도, 참을 인 세 번을 그리게 한 놈도, 살이 뒤룩뒤룩 찌고 뻥튀기처럼 부풀어 버린 ‘나’란 놈입니다. 하지만 산에서는 이 과대자아가 제 모습을 찾아 사그라들고 드디어 남과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생깁니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인연들이 그토록 정겹고, 발은 땅에 대고 있어도 마음은 산의 능선들을 가볍게 날아다니며 그토록 자유로운가 봅니다. 마음에는 온전하고 충만한 행복감외엔 ‘나’라는 망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로와지니 그동안 얼마나 자아에 종속되어 있었는가가 느껴집니다.
다시 가고 싶습니다...
산에서 도시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툭하면 산행사진을 보고, 또 보며 그리움을 달랩니다.
다음 산행공지가 떴을 땐 잘 때조차 미소가 떠오릅니다.
산행동무를 보면 다시 산속에 있는 듯 기쁨이 일어납니다.
우리 빨리 다시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