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출발 때문에 일정을 위해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대성문 표지판을 지나친 곳에서 부랴부랴 고픈 배를 채운다. 다정한 종원 오빠는 오늘도 맛난 치즈를 가져와 사람들의 입맛을 돋운다. 와인 몇 모금에 몸에 열이 일고 손 발에 피가 돈다. 몇 방울 남은 와인을 눈밭에 뿌렸더니 하얀 화선지에 빨간 꽃이 피었다.
몸이 언 사람들은 와인을 더 찾는다.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 미영언니. 물병에 와인 상표까지 버젓이 붙여 담아온 와인을 마시며 한참을 웃었다. 이 사람, 잠시 후 여느 때처럼 끊임없이 옷을 입고 벗고 하다가 ‘옷갈녀’ 라는 별명을 얻어 붙이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노숙페이스’ ‘거적데기 여왕’ 등 미영언니는 갈아입는 옷보다 더 많은 별명으로 알록달록해져 가고 있다. 한 시간 반이나 뒤쳐졌지만 삼십분만에 따라잡은 권록 오빠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마나토너의 은근한 체력에 혀가 내둘린다.
일어나 걸을라치니, 알딸딸한게 아무래도 고거 마시고 취했나보다. 발이 가로누이고 이리 젖히더니 좀 더 걷자 온 몸에 술이 퍼져 몸 전체가 들큰하다. 취기 오른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하얗고 점점이 검다. 흑백의 풍경에서 숲은 고요하고 나무도 흔들림 없는데 얌전히 눈발이 날려 수없이 작은 움직임으로 수를 놓는다.
솜같이 쌓인 눈이 주는 일체감으로 뭉쳐진 산과 나무는 너무도 다정하고 순결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만 쐬이던 땅은 모처럼 자신의 빛을 내 뿜어 시야 전체를 환하게 한다. 도시의 소음과 눈을 어지럽히던 현란한 색체가 사라지니 비로소 육감이 휴식을 맞는다. 때로는 억지로 웃게 하고, 때로는 억지로 화내게 했던 그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다정한 사람들만 한적하게 등장한 이 풍경은 마치 흑백 영화마냥 오래된 그리움을 충족시킨다.
이런 호젓함과 따스함을, 이러한 순결한 아름다움을 뭐라고 표현할까....
‘나중에 이런 사람을 만나야지. 겉은 항상 변화무쌍 다채롭고 활력이 넘치지만, 한꺼풀 벗으면 속은 이렇게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야지.’
대성문에서 시산제 준비가 한창이다. 며칠 동안 마음 한 켠을 어둡게 했던 문제가 다시 나를 괴롭힌다. “너만 기독교인이냐? 잘났다. 나도 교회 다녀! 나도 하는데 넌 왜 안 해! 그럼 뭐야? 난 기독교인 아니야?” 어린 시절 한 동안 집안을 편지풍파로 몰아갔던 그 문제가 새삼스럽게 다시 내 앞에 놓인다.
‘아니야. SM 사람들은 개인의 신념과 종교에 대해 존중해 줄 꺼야...’ 그래도 편치 않았다. 공동의 문제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각박한가!
“저... 제가 기독교 인이라...”
“아이고, 진작 말하지! 그것 때문에 마음 썼구나? 에고 내가 먼저 알아서 해야 되는데 미안하다.” 인란 언니 왈.
“아! 맞다. 알았어! 오 케이!” 산쌤 왈.
눈이 내뿜는 빛보다 마음이 더 환해 진다.
곧 시산제가 시작됐다. 연장자인 미영 언니가 사회를 보고, 경오 오빠가 대신 나서서 예식이 진행된다. 이윽고 선생님의 축원이 맑은 공기에 울려 퍼진다.
“우리 SM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옵시고.... 우리 누구는 꼭 30억 벌게 하옵시고... 우리 누구는 꼭 살을 빼게 하옵시고...” 웃기기도 하고, 내 이름이 나왔을 땐 감사하기도 한데 마음 한 켠이 뭉클하다.
북한산 어느 꼭대기에서 조용히 흐르던 그 축원은, 인간의 한계과 무능을 겸허히 인정하고 대자연 앞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간절히 염원하던 태고적부터의 전설임에, 어느덧 신령한 기분에 젖는다.
이곳에서 잠시 내려온 곳엔 상이 있었다. 상에 쌓인 흰 상보가 아깝도록 예뻐서 SM을 써놓고 혜자 언니는 사진을 찍는다. 시산제를 지낸 후라 상이 푸짐하다. 시산제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젯밥은 누구보다 탐 내며 신나게 먹어 치운다. 국을 데워놓고 바로 넣지 않은 탓인지 뜨끈하지 않은 된장국 때문에 못내 미안하다. 몸이 점점 덜덜 떨리는데, 용의주도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혜자언니가 목도리를 징징 감아준다.
구름에 달 가듯이 우리는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을 유유히 지나간다. ‘칠백리 산길’을 자적히 걷노라니 ‘긴소매가 눈발에 젖는다.’ 함상이와 조잘조잘 떠들고 정철이의 끊임없는 수다에 힐끗웃고, 사람들의 눈싸움에 함박 웃고 나니 어느덧 아쉬운 하산이다. 돼지머리까지 지고 힘겹게 올라와 놓곤 미리 내려가서 차를 가지고 다시 나타난 성훈이 덕분에 딱딱한 아스팔트 길을 터벅대지 않고 따뜻한 원석이네에 갈 수 있었다.
뒤풀이 때, 칸첸중가 트래킹 이야기가 한창이다. 선생님의 걸은 입담에 입술이 떨리도록 너무나 가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이를 허락지 않는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 지고 부러움에 서럽기까지 하다.
“현실을 생각하면 아무도 못가. 그래도 갔다와서 굶어죽는 사람 못 봤어.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알아서 나름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해. 다 벗어 놓고 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해.”
그래... 벗어야 한다... 오늘, 벗어놓은 산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던가!
그래... 내려 놓아야 한다... 언제까지 이 짐을 이고만 있을 텐가!
다 지켜주겠다고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결심했던 그 나날들이 그저 행복이기만 했다면, 여행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서러워지는 이 마음은 무엇이련가... 내려 놓지 못할 때는 아무리 큰 재산도 짐이기만 하다. 벗을 수가 없으면 아무리 알찬 노동이라도 허접한 때일 뿐이다.
내 인생에 여백을 숨쉬게 하고 쉼표를 울리게 하자. 꼭 올 해 안에 그 별들의 향연 사이에 내 삶의 찌거기를 별처럼 심어놓고 정화되서 떠나오는 그런 여행을 꼭 해야지. 어느 한 때 비겁했고, 어느 한 때 게을렀지만 치열하게 살아온 내게 이젠 선물을 줘야지....
이 날, 술이 많이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