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이 춥다고 벌써부터 난리였다. 체감 온도가 영하 16도에 달한다고 전날부터 가족들이 이 추위에 꼭 산행을 해야 하냐고 만류할 정도였다. 그러나 산행이 낙인 사람에게 무슨 망발을! 비가와도 가는데, 눈이 와도 가는데, 밤을 새고도 가는데, 추위 쯤이야!
당연히 모든 SM멤버들도 추위에 아랑곳 않고 모두 모였다. 이번이 처음 산행인 홍모(이요렉)는 추리닝 두 벌을 껴입고 얇은 거위털 점퍼를 입고 있다. 그나마 스니커즈를 신고 온다고 우기는 걸 주영 선배님께서 달래 등산화를 사 신겨 보내셨다. 괜스레 웃음이 번진다. '그래, 가서 당해봐야 등산복 살 생각이 날 것이다.ㅋㅋ' 월명 언니와 경오 오빠, 진구 오빠만 약간 늦어 대서문에 합류하고 나머지 산쌤, 홍모, 진기 등반대장님, 성은이 언니, 종원이 오빠는 미리 출발했다.
모든 경로를 각설하고 진짜 어제 무서웠다. 세상에, 북한산이 눈까지 와서 꽁꽁 얼어붙었으니 가벼운 산행이길 바란적도 없건만, 세상에... 그러나 당황스러운 건 그렇게 느낀 사람이 나 밖에 없는 듯 보인다는 거다.
대서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주섬주섬 오르다 보니, 어느덧 갖은 비탈길과 절벽들, 큰 바위들이 꽁꽁 얼어붙은 눈으로 도배가 돼서 나타났다. ‘여기를 어떻게 올라가!!’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지점들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진기 형님은 두 손에 스틱을 들고는 휘적휘적 잘도 오른다. 아니, 그게 오르는 거였는지, 산이 끌어당긴 거였는지 아직도 분간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암벽에서 허부적 거리던 찬란한 10년의 세월을 지닌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가 없다. 예전에 산쌤이 바위만 나타나면 순간이동을 하신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산쌤은 코오롱 등산학교 강사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한 명이어도 주눅들지 않는가? 그런데 진기 형님은 눈 시퍼렇게 뜨고 주시하고 있는데도, 경사길에서 갑자기 순간이동을 하는 거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바로 이런 황당한 꼴을 보시고는 ‘축지법’이라 일컬은게 틀림없다.
초입부터 겁에 질려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 무서워요! 그만가요!” 요런 말 한 마디를 해주질 않는다. 웬걸, 홍모는 그 덩치를 가지고는 진기 형님이 하라는 대로 씩씩거리면서 비둥바둥 어떻게든 올라서고 있질 않나, 겁 많다고 자부하던 성은 언니는 월명 언니가 삼손의 힘을 가지고 밀어줘서인지 위로 착착 달라붙고 있질 않나, 심장과 다리가 덜덜 떨리는데 혼자 엄살인 것 같아 안 갈수가 없었다. 종원 오빠는 자신이 환자라고 커뮤니티 곳곳에 떠벌려 놨으면, 좀 환자처럼 굴어야지 왜 아무 불평도 없고 목메는 소리도 없이 그저 오르고 있단 말인가? 한 술 더 떠 경오 오빠는 왜 등산로 개척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진구오빠는 왜 사라졌다 나타나다를 반복하고, 월명 언니는 왜 “가뿐하네!” 를 반복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내가 SM 총무만 아니었어도, 평상시에 산 잘 오른다고 칭찬받은 전적만 없었어도, 예전에 죽다가 살아났기에 마음만 진정되면 오를 수 있다는 가늠만 없었어도 중간에 혼자라도 내려갔을 꺼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지금 겁을 먹어서 그래. 그래서 배에 힘도 안 들어가고 시야가 좁아지고 다리와 팔도 맘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용기만 있으면 돼.’ 이렇게 생각했지만, 실상 이런 생각이 먹힐 정도의 상태면 애시당초 겁도 안 먹었다.
곰곰이 생각할 수록 내가 오른 건 그냥 악에 받쳐서이다. 운동부족인 홍모가, 죽겠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불평 한 마디 안하고 이를 악물고 오르니까 너무 쪽팔려서 안 오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진기 형님은 자꾸 같은 인간종이 아닌 것처럼 눈을 뜨고 봐도 믿지 못하게 후루룩 올라가니 약이 빡빡 올라 안 오를 수가 없었다. 올라가기만 하는가? 길도 없는 비탈을 이쪽 저쪽 뚫고 다니기도 하고, 오르지도 못할 데를 다시 내려오기도 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을 다 코치까지 해 준다. 대체 몇 년만에 그렇게 약이 올랐는지 기억도 안난다. 진기 형님에겐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워보이는 일에 골을 싸매고 있는 자신이 병'신같아 보이기도 한다. 진기 형님은 아마도 “이곳만 지나면 괜찮아. 그냥 평지야.”라는 말에 자꾸자꾸 속아 내가 좋다구 올랐으려니 여기고 있을게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다.
첫 번째에는 “아싸~끝이래~!!” 거리고 올라가다 당했고, 두 번째에는 ‘이번엔 진짜겠지.’ 하다 당했고, 세 번째부터는 ‘우씨~ 또 험한데 나오나 보다. 젠자~~앙!’ 하기 시작했다. 누굴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 취급을 해도 분수가 있지, 내가 아무리 잘 속는 인간이라도 그렇지...TT
나중엔 머리가 이상해 져서 ‘왜 내 손발에 X맨의 울프같은 쇠갈퀴가 없는 거야! 아차! 그럼 뺄 때 뒤로 넘어지겠군. 차라리 드라큘라같이 온몸이 부서져도 홀랑 다시 붙어버리는 몸이면 이렇게 겁먹고 질질 짜지 않을텐데...’ 이런 이상한 생각까지 하고 있다.
평탄한 길이 시작되서 한 숨 돌리고 있는데, 다른 일행이 나타나 “에고, 어찌 아이젠도 안 차고 오르시나. 이제부터 정말 길이 험한데...쯧쯧.” 걱정해 준다.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져 있는지 이 사람들은 모르는 거다. 진구 오빠는 재밌다고 웃는데 걱정이 앞선다. 우린 그나마 오르면서라도 통과했지, 그 사람들 그 길을 어떻게 내려갔을 지...ㅡ_ㅡ
우짜동 우린 누락된 사람없이 다들 무사히 올랐고 다들 가뿐하게 내려왔다. 심쌤께서 이른바, ‘머릿수 맞춰서 내려오기’ 인 SM의 목표를 달성한 거다. 그정도가 아니라, 중간중간 휴식시간과 식사 시간엔 신나게 떠들고 웃어 제끼다가 내려왔다.
“이 녀석들이 투덜대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버리고 갈 껄 아니까, 이젠 험한 코스 나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올라와.” 심쌤왈.
“맞아요~ 애들은 강하게 키워야 되요.” 월명 언니왈.
아니, 난 그동안 SM에서 산행을 안 했단 말인가? 근데 왜 이렇게 무서웠지? 이유를 파헤치며 내려오고 있는데, 홍모는 “선생님~ 내려가는 거 심심해요. 아깐 무섭기라도 했지. 아깐 재밌었는데...” 이러고 있다. 첨 산행인데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우스갯 소리도 잘 해서 다들 귀엽다고 하니까 이 녀석 재미 단단히 들였나 보다. 옆에서 종일 떨었던 자신이 무렴해 진다.
정말 모르겠다. 평상시 ‘겁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내가 생각해도 난 겁이 없다. 별 이상한 상황을 다 만났어도 남들 하듯이 어쩔 줄 모르면서 머리 굳어본 적이 없다. 항상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정신 차리고 사람들 다독이는게 내 모습이었다. 엔간히 험해도 산에 잘 올랐고 ‘좀 다치면 되지. 뭐.’ 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지? 왜 뒤에 낭떨어지가 있으면 그렇게 무섭지? 다른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도 않지?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결론으로는 이유는 두 가지 이다. 첫째, 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약하다. 우선 나란 인간이 걱정이 많고 비관적이다. '미끄러진다면, 헛디딘다면' 생길 수 있는 각종 최악의 상황만 머리에 떠올려 놓고 패닉에 빠지는 거다. 둘째,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선생님께선 등산 학교를 다니면 경사에 대한 감이 달라져서 그정도 길이야 웃으며 다닐 수 있다 하시지만, 애시당초 등산 학교에 나같이 외장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만 올라가도 주저 앉아 버리고, 건물 꼭대기에선 항상 가운데에만 있으려 하는 인간이 가기도 하나 궁금하다.
그래도 진짜 이상하다. 왜냐면, 그 상황에서 무서워 했던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 무섭지 않았던 사람들이 정말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목도 목이지만 며칠 전 내린 눈이 아마도 얼음으로 변해 있을 거라는 두려움에 발목이 잡혔다우...
내가 갔으면 '머릿수 맞춰 내려오기' 힘들었을 듯...
암튼 대단들 하십니다...
항상 내가 산에 가자고 하면 여기 올린 글이나 사진만 보고
절레절레하던 친구들 맘이 이제 이해가 간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