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은 인왕산에 올라 빈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제2회 인왕산의 무속과 민불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2017년 4월 1일 토요일, 박근혜 전대통령이 구속기소되어 서울구치소(의왕시)에 입감한 다음 날. 며칠 간 서울 하늘을 뒤덮었던 미세먼지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모처럼 화창한 봄날이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1번 출구 앞에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제2회 인문산행의 참가자들이다. 주변이 너무 어수선하여 약속시간인 10시가 되자마자 일단 인왕산을 향하여 발걸음부터 떼어놓는다.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치고 올라가자 불현듯 인왕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왕산 인왕사라고 쓰인 합동 일주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인왕(仁王)은 석가(釋迦)의 미칭(美稱)으로, 산에 예전에 인왕사(仁王寺)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광해군일기]의 1613년(광해군 8년) 기록이다. 부처를 아름답게 높여 불러 ‘인자한 왕’이라 하는데, 예전부터 이 산에 인왕사라는 절이 있어 산 이름 또한 그리 부른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인왕산을 불가(佛家)의 산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인왕사가 현재의 합동 일주문 뒤에 있는 저 인왕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 인왕사라 불리는 곳은 정확히 표현하여 절집이라기보다는 당집 연합에 가깝다. 수년 전 저곳에서 학술발표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들 역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왕사의 법등(法燈)을 이었다”고 할 뿐, 현 위치가 옛 인왕사의 구지(舊址)라고 확언하지는 않았다. 인왕사 구지를 정확히 비정하는 것은 우리 인문산행팀의 임무이다. 우리는 오늘 그곳으로 갈 것이다.
마애불과 미륵 그리고 민불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는 선바위 조금 못 미쳐 있는 무명의 마애불이다. 현재 관음사에서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 그리고 따라붙은 부제가 ‘청정 미륵기도 도량’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면 건너편의 안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다. 이 마애미륵불 앞에는 기도를 올리거나 쉬어가기 편하도록 차양이며 앉을 자리 따위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빙 둘러서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이다. 인문산행의 주최측과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다.
마애불과 미륵 그리고 민불에 대하여 심산의 짧은 강의가 시작된다. 사실 이 세 가지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그 각각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현재 우리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양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있는(전형적인 불상의 수인(手印)과는 사뭇 다르다) 이 존재는 마애불이면서 미륵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불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이 불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은데, 동네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대략 100년 전쯤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나는 편의상 이것을 ‘인왕산 남미륵’ 혹은 ‘인왕산 할배’라고 부른다.
오늘의 주제인 ‘무속과 민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실 무속과 민속 역시 그 경계가 모호하다.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무속이면서 민속은 아닌 것들도 있고, 민속일 뿐 무속은 아닌 것들도 많다. 이들 중 바위와 관련된 신앙행위들을 이태호는 뭉뚱그려 ‘바위신앙’이라 부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은 태고적부터 바위에 대한 신앙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왕산은 전국에서도 으뜸가는 바위신앙의 기도터였다.
선바위 일대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곳
인왕산의 바위신앙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선바위이다. 이 신령스러운 바위에 스토리텔링이 없을 수 없다. 한양도성을 축조하기 직전의 일이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제외시킬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선바위를 불교의 성지로 인식하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교세력을 견제하려던 정도전은 결사반대했다. 태조 이성계는 묘한 중재안을 내놓았다. “눈이 내린 다음 눈이 녹는 선까지를 도성 안에 포함시키자.” 결과는? 선바위가 있던 곳의 잔설(殘雪)은 끝내 녹지 않아 결국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믿거나 말거나’식 스토리텔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굳이 검증해 보겠노라며 소매를 걷어붙일 필요는 없다. 그저 조선 개국 초기에 불교세력과 유교세력 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위의 ‘눈 녹은 선’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은 북한산 인수봉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서울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것과 관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곧 눈 ‘설(雪)’자와 울타리를 뜻하는 ‘울’자가 합쳐져 ‘설울’이 되었다가 그것이 ‘서울’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한자로 선(禪)바위라고도 하는데, 굳이 불교적 용어인 선(禪)자를 쓴 것은, 그 모양이 “스님 두 분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어떤 이는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고도 한다. 나의 의견은 다르다. 선바위는 그저 선돌,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입석(立石)일 뿐이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기 훨씬 전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 한양 일대에서 ‘가장 영험한 바위’로 알려진 이 바위는 자식 얻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려 ‘기자암(祈子岩)’이라 불리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선바위는 오늘날 인왕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선바위 뒤편으로 돌아나간다. 인왕산 산신각을 지나쳐 암맥(巖脈)을 타고 오르면 도처가 바위신앙의 기도터이다. 저 아래로 안산자락과의 사이에 서대문 독립공원이 보인다. 1908년 일본인들이 지을 당시의 이름은 경성감옥이다. 이후 명칭은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 경성형무소(1946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1987년) 등으로 계속 바뀌었지만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았다. 저곳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빼앗긴 사람들이 옥바라지를 하며 오르던 산이 바로 인왕산이다. 그들은 인왕산 자락의 여관(대체로 당집을 겸했다)에 아예 살림을 차리고 매일 이곳에 올라 빌고 또 빌었다.
나는 학생운동이 극성했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덕분에 대학 선후배들 중에는 ‘서울구치소 동기생’들이 많다. 1987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의 회원이었던 친구의 어머님들을 몇 분 모시고 이곳에 올랐다. 그들은 주먹만한 돌멩이를 들고 이곳의 바위에 문질러대며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아직도 그들의 한 맺힌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하여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제 아들이 저 감옥 안에서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보살펴 주시옵고, 천하의 살인마 전두환에게 천벌을 내려주시도록 빌고 또 비나이다.”
국사당과 용궁 그리고 천존단의 제석불
저 유명한 국사당은 선바위와 지척의 거리에 있다. 1395년 태조 이성계는 남산에 국사당을 세워 목멱대왕을 모시고 국가 차원의 공식제례를 지내도록 했다. 이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일본인들이 그 자리에 자신들의 신사(神社)를 세우며 국사당을 내쫓았다. 현재 인왕산의 국사당은 그때 이리로 이전해온 것이다. 남산의 산신인 목멱대왕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모시던 조선시대 최고의 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오자 그 이전부터 인왕산을 주무대로 활약해오던 무속인들은 오히려 용기백배하였다.
국사당과 선바위 사이의 계곡 도입부에 용궁(龍宮)이 있다. 일찍이 조자용은 산신, 용왕신, 칠성신을 한국의 삼신(三神)이라고 하였다. 이들 중 용왕신은 바다에 살고, 거북을 메신저로 부리며, 용(龍)을 부리거나 스스로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비를 뿌리게 한다. 따라서 어부나 해녀 등 바닷가에 사는 민초들은 용왕신을 섬기고, 조정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도 용왕신께 빈다. 산속에라도 맑은 물이 샘솟는 곳은 용궁, 용왕샘, 용왕굴 등으로 부른다. 인왕산에는 이러한 용궁들이 많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이 그들 중 가장 유명하고 영험한 용궁이다.
용궁이 위치해 있는 계곡을 나는 편의상 선바위 계곡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의 발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깨끗하게 잘 손질된 당집 터가 나온다. 나는 이곳을 ‘맨윗당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김덕묵의 역저 [전국의 기도터와 굿당](전3권, 2002년, 한국민속기록보존소)을 보니 무속인들은 이곳을 천존단 혹은 칠성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곳의 바위에도 어여쁜 마애불이 있다. 무속인들은 이것을 제석, 제석이, 제석불, 대석, 대석이 등으로 부른다. 제석(帝釋)이란 무속인들이 모시는 최고의 신들 중의 하나인데, 그 이름 뒤에 다시 불(佛)자를 붙인 것은 무속과 불교의 융합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앞서 살펴본 ‘인왕산 할배’와 대를 이루는 개념으로 ‘인왕산 할미’라고 부른다. 오늘이 길일(吉日)인지 이곳 천존단을 포함하여 인왕산 전체에 굿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방울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세조의 복세암과 인왕사 구지 그리고 금강굴
한양도성의 안쪽으로 진입하려면 천존단에서 산을 횡단한다. 그 횡단길에도 도처에 당집 터들이 즐비하다.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공터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간단한 점심식사를 즐긴다. 도성 안으로 진입하니 가파른 바윗길들이 이어진다. 예전에 이곳을 지키던 군인들이 닥터링(바위를 쪼아 계단 따위를 만드는 일)을 잘 해놓아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정상에 서서 탁 트인 사위를 둘러본 다음 치마바위 쪽으로 하산한다. 계속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면 한양도성을 벗어난다. 기차바위를 지나 홍제동 쪽으로 내려가면 흥미로운 마애불이며 석불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사전답사의 결과 참가자들의 체력 안배를 위하여 홍제동 방면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대신 우리는 오른쪽으로 꺾어져 석굴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약간 가파른 산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니 매우 인상적인 바위굴이 나타난다. 현재는 인왕산을 지키는 의경들의 휴식처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데,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법 규모가 크다. 이곳이 바로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스스로 조성했다는 개인 암자인 복세암(福世菴) 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의 복세암은 산정(山頂) 부근의 암자였다고 하니 이곳 이외의 다른 비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참가자 한분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수양대군이 여기까지 올라왔을까요?” 당연히 그렇다. 그는 북한산 보현봉에도 수 차례 올라 호시탐탐 경복궁을 엿보았던 야심 가득한 사내였다. 그는 아마도 사병들을 거느리고 인왕산에서 호랑이 사냥도 즐겼을 것이다.
꽤 가파른 바윗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면 곧 석굴암이다. 이곳에는 볼만한 바위유적들이 많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산신단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훌륭한 음각 마애산신도인데 1957년(북방불기 2984년)에 조성되었다. 석굴암 대웅전 자체가 바위의 예술이다. 박정희의 산중암자철거령(1968년)과 새마을운동의 일환이었던 전국미신타파운동(1978년)에도 없앨 수 없었던 바위의 성채이다. 석굴암 근처의 천향암 역시 볼만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선호하던 최고의 기도터에는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곧 영험한 바위와 샘물(용궁) 그리고 석굴이다. 누구라도 이곳에 이르면 그 세 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최고의 기도터임을 육감적으로 알 수 있다.
석굴암을 등지고 섰을 때 오른쪽으로 마른 내를 건너 산 모퉁이 하나를 에돌아가면 거의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 미륵존불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근대 100년 이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존불 옆에는 양각 마애산신도가 있다. 산신과 동자 등의 코가 훼손된 것은 아마도 민초들의 기자신앙 때문이리라. 나는 이 미륵존불을 ‘인왕산 동미륵’이라고 부른다. 석굴암에서 수성동계곡을 향하여 조금 내려오다 보면 금강굴의 상단 부분과 만날 수 있다. 이는 최근의 사전답사 중 인왕산악회의 원로회원과 우연히 만나 기적적으로 확인하게 된 쾌거이다. 인왕산악회의 전신인 알파인 탑 클럽의 마애각문 옆에 하강용 피톤이 박혀 있는데, 이곳에서 현수하강을 감행하면 매우 거대한 규모의 금강굴과 마주치게 된다(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사전에 미리 해당 군부대의 허락을 맡아야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다. 금강굴과 석굴암과 복세암은 거의 일직선 상에 위치한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양도성도](1770년대)를 보면 인왕산 수성동의 기린교 우측 계곡 상단에 금강굴과 옥등굴 그리고 칠성암이 보인다. 인왕산악회가 확인해준 금강굴이 곧 바로 그 금강굴이고, 현재의 석굴암이 옥등굴이며, 치마바위 아래의 폐암자터가 칠성암인데 이것이 곧 세조가 세웠다는 복세암인 것이다. 세조의 복세암은 조선 중기로 넘어오면 칠성암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물론 칠성신을 모시는 곳이며, 조선의 유생들조차 칠석날이면 이곳에 올라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칠성불공을 올렸다고 한다([춘향전] 참조). 그렇다면 과거에 옥등굴이라 불리던 현재의 석굴암은? 이곳이 바로 저 유명한 인왕사였다. 조선의 태조가 1397년 6월에 인왕사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개국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던 유명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석굴암에서 내려와 인왕천 쪽으로 우회 횡단한다. 인왕천에 가 닿기 전에 만날 수 있는 마애미륵불과 마애산신도는 또 다른 덤이다. 인왕천 앞에 이르러 인왕산의 한자 표기를 인왕(仁王)으로 할 것인가 인왕(仁旺)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조장빈의 짧은 강의가 이어진다. 오늘의 인문산행은 수성동 계곡에서 마무리된다. 몇몇 참가자들과 주최측은 통인시장 안의 한 허름한 밥집에 모여 앉아 간단한 하산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강한 비바람과 더불어 세찬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무속신앙과 민속신앙의 메카인 인왕산에서 방금 내려온지라 결론은 빤하다. 인왕산신께서 우리의 산행을 편안하게 이끌어주신 것이다.
월간 [산] 2017년 5월호
여전히 지면이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하다가 만듯한 느낌이다
월간 [산]의 한필석 편집장님께 현재의 4페이지를 6페이지로 늘려달라고 부탁드렸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월간 [산]이 결정한다
본문 중의 금강굴...언제 제대로 산행 허가를 받고 본격적으로 답사할 생각이다
같이 갈 사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