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놀던 그곳이 대군의 별업이었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북한산 조계동의 인평대군 송계별업을 찾아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 송석호(한국산서회)
올해 첫 인문산행의 집결지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앞이었다. 2018년 3월의 첫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집결지에 모여든 참가자들은 쇠락한 아카데미하우스를 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곳은 일찍이 1970년대 개신교 계통 민주화운동의 베이스캠프였다. 1990년대까지도 북한산 자락의 소박한 결혼식 장소로 애용되었으며, 2000년대에는 국제청소년음악회 참가자들의 아름다운 연습장이자 숙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유치권 행사중’이라는 섬뜩한 경고문이 출입문을 가로막고 있는 버려진 건물들만 즐비할 뿐이다.
오늘 우리는 북한산성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동쪽 계곡으로 올라 잠시 대동문에서 쉬고 동북쪽 능선으로 내려간다. 동쪽 계곡은 구천계곡이고 동북쪽 능선은 진달래능선이다. 구천계곡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조어에 불과하다. 그저 구천은폭이 있는 계곡이라 하여 구천계곡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조계동(曹溪洞)이다. 계곡 중상단에 위치해 있던 고려시대의 사찰 조계사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실제로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조계동이라 표기되어 있다. 동(洞)이라는 표현은 대개 계곡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부석금표와 분청사기 가마터
오늘의 참가자들이 속속 집결한다. 애초부터 1월과 2월에는 인문산행을 진행하지 않기로 하였다. 겨울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참가자들을 모시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내리다가 자칫 안전사고라도 날까 염려한 까닭이다. 덕분에 혹한의 겨울을 피해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사람들은 즐겁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봄 인사와 덕담을 나눈다. 익숙한 얼굴은 익숙해서 반갑고, 처음 보는 얼굴은 처음이라 반갑다.
분청사기 가마터 옆의 너른 공터에서 올 한해 인문산행의 첫 강의를 시작한다. 강사는 한국산서회 이사이며 오늘 우리가 돌아보게 될 거의 모든 답사대상들을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해낸 당사자인 조장빈이다. 첫 번째 주제는 부석금표(浮石禁標)다. 부석(浮石)이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채석(採石)의 옛스러운 표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8월 20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각산 밑 조계동 위에 석재 채취 금지의 푯말을 세웠다. 도성의 주맥인데도 관민이 대부분 이곳에서 석재를 채취하기 때문이다. 호조판서 서유린이 이것을 아뢰자 총융청에 명하여 경계에 푯말을 세워 금지하게 한 것이다.”
총융청은 1788년 8월 22일 모두 6개의 금표를 설치했다고 보고했다.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은 그것들 중 4개를 발견했다. 오늘의 산행에서는 코스의 형편상 그 중 2개를 참가자들에게 공개했다. 첫 번째 것은 분청사기 가마터와 현재의 공터 사이에 있는데 단순히 ‘금표’라고 표기되어 있다. 두 번째 것은 가마터를 벗어나 등산로 초입의 왼쪽 기슭에 있는데 ‘부석금표’라고 표기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이토록 익숙한 길가에 저런 것이 새겨져 있었다니 하면서 저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분청사기란 조선 초기에 잠깐 유행했던 도자기의 한 형식이다. 간단히 말해서 고려청자가 스러지고 조선백자가 완성되기 전에 과도기적으로 통용되었던 도자기인 것이다. 도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 조계동 자락에 이 정도 규모의 가마터가 운영되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조선시대 관요의 성립 이전 서울지역 도자 수급체계 추적의 단서를 엿볼 수 있어 2011년에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인조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었던 인평대군
등산로를 따라 약 200미터 쯤 오르다 보면 왼편의 나직한 축대 위에 제법 너른 배드민턴장이 나온다. 약수터도 겸하고 있어 ‘영비천(靈秘泉)’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입간판까지 달아놓은 이곳에서 동네주민들은 시름을 잊고 여가를 즐길 뿐이다.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몰랐었다. 바로 이곳이 안평대군과 더불어 ‘시서화에 가장 뛰어났던 조선의 대군’으로 손꼽히며 ‘대청외교의 전문가’로 칭송 받았던 인평대군의 송계별업 터라는 사실을.
인평대군(隣坪大君, 1622~1658)은 누구인가? 인조의 셋째 아들 이요인데, 호는 송계(松溪)이며, 효종의 동생이다. 그는 특히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왕좌에 있는 동안 무려 11번이나 청나라에 외교사절로 다녀온 일로 유명하다. 사실 ‘외교사절’이라는 표현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청나라를 어르고 달래고, 청나라에 아부하고 빌기 위하여 다녀온 것이다. 능히 짐작할 수 있다시피 모두 다 인조 재위기간의 병자호란과 효종 재위기간의 (터무니없는) 북벌론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다녀온 대청사행길을 살펴보면 한양에서 북경까지 오직 육로로만 다녔는데 총 3,100리에 약 40일이 소요되었으니, 북경에서의 체류기간까지 합치면 한번 갈 때마다 거의 반년 가까이 머물렀던 셈이다. 이 같은 고행을 무려 11번이나 되풀이하였으니 그가 불과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한 마디로 사고는 아버지와 형이 쳤는데 수습은 그가 도맡아 죽을 고생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인평대군에게도 그러나 짧은 봄날과 숨 쉴 틈은 있었다. 25세가 되던 해인 1646년, 삼각산 조계동에 아름다운 별업(別業)을 짓게 되니 그곳이 곧 지금 우리가서 있는 이곳 송계별업이다. 그가 남긴 <제조계보허각암벽상>에는 저간의 사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현해당 옮김).
“삼각 은폭이 여산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익히 들었으나 가보지 못하다가 병술년(1646년) 3월, 우연히 조계동을 유람하던 중 마침내 그 빼어난 경치를 보게 되었다. 한 가닥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내리니 이름과 실제가 다르지 않았다. 이에 구덩이를 파고 골짜기를 메워 누대와 정자를 지으니 더 없이 맑고 깨끗하였다. 때때로 거문고와 술병을 들고 바람과 달을 노래하며 맑은 물에 목욕하고 아름다운 골짜기를 소요하였다. 각은 보허라 하고 당은 영휴라 이름 하였다. 아, 천년 후에 아름다운 기둥과 서까래는 비록 무너지고 없을 것이나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돌다리와 은폭이 아니겠는가?”
영휴당과 보허각과 구천은폭 그리고 송계별업 바위글씨
송계별업은 단일건물이 아니다. 그는 이곳 조계동 일대를 온통 자신의 별장과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그가 세운 건축물은 두 개로 보인다. 하나는 영휴당(永休堂)이다. 그 터가 바로 지금 이곳 우리가 서 있는 배드민턴장이다. 다른 하나는 보허각(步虛閣)이다. 우리는 그 터를 구천은폭 바로 아래로 비정한다. 영휴당(터)에서 보허각(터)은 빤히 올려다 보인다.
이제 보허각이 있었던 구천은폭으로 이동한다. 뜻밖에도 하얀 얼음이 꽝꽝하게 얼어있다. 3월 초가 되면 얼음이 녹아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리라 예상했던 우리의 불찰이다. 참가자들을 이끌고 폭포 옆의 벼랑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멋진 바위글씨와 힘찬 폭포수를 보여주기는 글렀다.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꽝꽝 얼어붙은 얼음더미들 덕분에 폭포의 모습이 더욱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 예전에 여기서 아이젠과 피켈을 갖추고 빙벽연습을 했었는데.”
참가자 한 분이 옛 추억을 되새긴다. 그렇다. 이곳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이름 난 빙벽연습장이었다. 나 역시 산 선배를 따라 와 어설픈 동작을 연출하며 땀에 흠뻑 젖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뿐인가. 한여름이면 늘 이곳에 탁족을 하러 왔었다. 북한산 자체가 물을 잘 머금지 못하는 산이라 언제나 부족한 수량 때문에 갈증을 느끼다가 비가 장대 같이 쏟아 붓는 날이면 옳다구나 하고 달려왔던 곳도 여기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비홍지교(飛虹之橋,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놓고 그 건너편에 작은 정자를 지어 보허각이라 불렀다. 보허(步虛)란 ‘허공을 걷는다’는 뜻의 도교적 용어이니 홍예교 형식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마도 보허각이 있었을 법한 얼음폭포 위에서 다 같이 기념촬영을 한다. 넉넉한 마음씨의 참가자들은 ‘구천은폭’ 바위글씨가 얼음 속에 숨어 있다고 우리를 타박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맨날 와서 놀던 이곳이 인평대군의 별업이었다니!”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릴 뿐이다.
구천은폭이라는 바위글씨는 누가 봐도 명필이다. 나는 서울시내와 근교에서 이보다 멋진 바위글씨를 본 적이 없다. 한 글자 당 가로세로 70센티미터 크기인데 아래로 내려 써서 전체 3미터 규모의 대작이다.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이신서(李伸書)라고 새겨 스스로 서예가를 밝혔다. 이신은 당대의 명필로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 인물이다.
지난 해(2017년) 여름,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은 이곳 조계동을 그야말로 샅샅히 뒤졌다. 기록에 남아있는 창벽(蒼壁)과 한담(寒潭)이라는 바위글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즈음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바로 송계별업(松溪別業)이라는 바위글씨를 찾아낸 것이다. 이 일대가 송계별업이라는 확신은 가졌지만 물증을 댈 수 없었던 차에 그 모든 추론들이진실임을 판명(!)하게 만든 획기적 쾌거였다. 다만 접근로가 조금 험하고 아직도 눈과 얼음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이번 산행의 참가자들에게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 주십사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계동 일대는 조선왕릉 으뜸의 채석장이었다
구천은폭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상단부 왼쪽 바위벽에서는 또 다른 바위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조장빈 이사가 찾아낸 것으로 <사릉부석감역필기>라고 한다. 사릉(思陵)이란 무엇인가?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현재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그 사릉을 건설할 때 필요했던 바위들을 이곳에서 채석(부석)했고, 이 공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 바로 <사릉부석감역필기>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공사실명제’ 겸 ‘감리확인서’의 표지판인 셈이다.
이 바위글씨를 읽어보면(현해당 옮김)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시공일자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이 기록 역시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 옳다. 이곳에서 부석하여 사릉을 건설한 해는 1698년이었다. 왜 사릉은 장릉(단종의 왕릉)과 더불어 그때 만들어졌는가?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은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 기간 동안 조선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400만명이 굶어죽었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당장 폭동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국가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숙종은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단종을 복위시켰다. 당시 단종은 이미 민간과 무속에서 일종의 신으로 떠받드는 존재였다. 그러니 ‘너희 백성들이 떠받드는 신(단종)을 내가 어명으로서 복권시키노라’하는 뜻으로 장릉과 사릉을 건설한 것이다. 장릉은 영월에 있으니 한양 부근에서 부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릉은? 당연히 한양도성 인근의 이곳 조계동에서 부석했다. 왜? 이유는 간명하다. 이곳의 화강암 바위 질이 단단하고 아름답기로는 당대 최고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왜 하필이면 이 조계동 자락에 부석금표들을 설치했는지가 분명해진다.
대동문에서 진달래능선을 따라 우이동으로
송계별업을 떠나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곳곳에 눈과 얼음이 남아 참가자들의 발걸음을 긴장시켰던 것이다. 점심식사는 조계사 터에서 했다. 고려시대의 고찰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 터가 매우 협소하여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게 하는 장소다. 참가자들 중의 한 분은 혹시 송계별업의 영휴당 터(배드민턴장)가 조계사 터가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연구한 고문서들을 토대로 고증해보면 이곳을 조계사 터로 비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산길은 진달래능선으로 잡았다. 아시다시피 능선 내내 만경대와 인수봉을 조망해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건넨다. “이름이 진달래능선인데 진달래 필 때 올 걸 그랬어요. 구천은폭도 제대로 못 보여 드려서 죄송하고.” 참가자들은 오히려 우리를 달랜다. “덕분에 겨울산으로 올라 봄산으로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하산길에 왼편으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이 곧 ‘우이구곡’이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쉴 때마다 언급해보지만 그 전모를 보여주고 설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언젠가 따로 시간을 내어 찬찬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구곡이다.
산행의 종점은 우이동 에코로바 커뮤니티 숍이었다. 한국산서회의 부회장을 역임한 호경필이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다. 참가자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커피며 우롱차 등을 홀짝거리며 오늘의 산행에 대한 감회와 평가 등을 이야기한다.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지만 대세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무심히 밟았던 산길 바로 옆에 그런 유적이 있었다니. 우리가 놀던 그 자리에 그런 역사가 서려 있었다니. 그런 것들을 찾고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인문산행의 존재이유이며 묘미인 것이다.
월간 [사람과 산] 201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