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21-05-03 18:12:02 IP ADRESS: *.38.16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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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김시습을 읽다 1

 

오래된 친구와 모처럼 연락이 닿아 함께 점심을 먹었다. 허름한 백반집에 마주 앉은 우리는 정오도 되기 전부터 낮술을 기울였다. 쓸모는 없는 대신 정겨운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세 번째 소주병을 막 눕혔을 즈음 친구가 서둘러 일어났다. 처리해야할 일이 남아있어 회사로 복귀해야 한단다. 홀로 남겨진 나는 혼술을 하기도 계면쩍어 하릴없이 터벅터벅 걸어 집필실로 돌아올 밖에.

 

심산재(深山齋)는 노고산 기슭에 있는 나의 집필실이다. 비좁고 허름한 공간이지만 고층건물의 한 귀퉁이에 있어 전망은 제법 좋은 편이다. 북창(北窓) 너머로는 안산이 저 멀리 펼쳐져 있고, 동창(東窓) 바투 앞에는 노고산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오늘따라 봄볕이 좋고, 봄바람도 싱그러우며, 신록은 초여름을 맞이하려는 듯 한층 더 푸르러졌다. 이런 날의 오후를 실내에서만 보낸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노고산으로 들어간다.

 

심산재에서 십 여분 남짓 걸으면 이내 나의 야외독서공간에 가 닿을 수 있다. 우거진 녹음(綠陰) 아래 간간이 햇살이 비껴드는 고즈넉한 공간이다. 탁자 위에 책을 펴놓고 습관처럼 김시습을 읽는다. 김시습 시선(詩選)에는 참으로 다양한 버전들이 있는데, 편역저자(編譯著者)에 따라 저마다 해석이 다르다. 그 차별성을 인지하면서 본인만의 독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한시(漢詩)를 읽는 즐거움들 중의 하나다.

 

나무 그늘 아래의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때면 햇살을 담뿍 받고 있는 벤취로 옮겨 앉는다. 등받이에 기대어 두 눈을 감으면 그대로 행복한 일광욕의 시간이다. 목이 마르면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두어 모금 홀짝거린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허락된 흡연공간이 지척에 있다. 여차하면 배낭에 책이며 커피며 필통 따위를 모두 꾸려 넣고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이 나지막한 산의 이 구비 저 구비를 훠이훠이 걸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게는 이보다 더 훌륭한 야외독서공간이 따로 있을 리 없다. 내가 노고산을 사랑하는 이유다.

 

문득 수락산 시절의 김시습이 떠오른다. 그가 머물던 곳 혹은 그 근처에 성전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그 암자가 대략 어느 곳에 위치해 있었을까는 충분히 비정(比定가능하다. 금류폭포와 정상 사이다. 아마도 현재의 내원암 자리이거나 과거의 수락산장 자리일 것이다. 수락산장 앞의 옹달샘이 부지(鳧池),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부지천인데, 바로 금류폭포의 원류가 되어 옥류폭포까지 길게 이어지는 계곡을 이룬다.

 

김시습은 수락산에 살 때 같은 계곡에 터를 잡고 있던 어떤 노인과 가깝게 지냈던 듯하다. 그 노인은 수담(手談, 바둑)을 함께 나눌 정도였으니 완전한 무지랭이는 아니었으리라. 그의 시 <題水落山聖殿庵(제수락산성전암)>은 수락산 시절의 한가롭고 고즈넉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전체가 4행 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인데 특히 마지막 3행과 4행이 아름답다.

 

碁罷溪翁歸去後 기파계옹귀거후

바둑을 마친 계곡의 노인이 돌아간 뒤

 

綠陰移案讀黃庭 녹음이안독황정

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황정경을 읽노라

 

여기서 황정이란 황정경(黃庭經)을 뜻하는데, 양생과 수련의 원리를 다룬 도교의 비전(秘傳)이다. 김시습은 이 책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의 시에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마음에 들어 하는 구절은 다름 아닌 녹음이안(綠陰移案)’이다. 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글을 읽다니 이 얼마나 멋진 풍류인가. 고작해야 몇 평도 되지 않고 오후에는 햇살도 들지 않는 집필실 안에서야 책상을 옮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럴 때는 주저 없이 나무 그늘 아래에 책상이 놓여있는 야외의 공간으로 훌쩍 떨쳐나서야 한다.

 

햇살이 너무도 따사로운 오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다가 새삼스레 김시습의 시구(詩句)를 곱씹어본다. 아, 바로 지금 내가 녹음이안을 한 것이로구나. 그 옛날 수락산의 김시습은 계곡의 노인과 바둑을 둔 다음 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황정경을 읽었다. 오늘 노고산의 나는 옛친구와 낮술을 마신 다음 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김시습을 읽는다. 그렇다면 그의 시구를 흉내 내어 이런 글을 장난삼아 한번 끄적거려볼만도 하지 않겠는가.

 

午酒舊友歸去後 오주구우귀거후

낮술을 마신 옛친구가 돌아간 뒤

 

綠陰移案讀東峯 녹음이안독동봉

나무 그늘 아래로 책상을 옮겨 김시습을 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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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스쿨] 2021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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