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3-04 16:52:28 IP ADRESS: *.254.8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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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05 낭가파르밧 루팔벽

등정기 - 나머지 대원들 마음도 함께 가지고 정상에 섰다
35년만에 중앙립 루트 재등정...김창호, 이현조 디아미르쪽으로 하산

▲ 7,500m 메르클 린네를 등반 중인 송형근 이현조 대원.

배낭을 들고 긴 얼음 동굴을 빠져 나왔다. 버릇처럼 하늘바라기를 한다. 별빛이 쏟아진다. 혹 그 사이로 네 개의 랜턴 불빛이 아른거릴까 벽으로 눈길을 돌리지만 빌란트 대암탑이 막아선다. 6월26일 새벽 2시다.

고정줄에 등강기를 걸었다. 줄은 설사면을 가로지르고 바위벽을 올라쳐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연결된 그 끝자락에서 이미 1시간 전에 C4(7,150m)를 출발하여 정상으로 향하고 있을 네 명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너무나 조용한 산의 정적 속으로 아이젠에 밟히는 일정한 리듬과 안전벨트에 달린 하강기 부딪히는 소리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뒤에는 주형이 형이 따르고 있다. 그는 이미 97년에 서측 디아미르벽으로 낭가파르밧(8,125m)의 정상을 올랐는데 이번 원정에도 함께 하고 있다. 이는 우리 팀의 성격을 보여주며 따라서 원정대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다. 낭가의 남측면을 깎아 린 4,500m의 표고차와 평균경사 60도 루팔벽 중에서도 중앙 직등루트(남남동측릉?디레티시마)를 완성하는 것이다.

▲ 4월 20일 이른 시즌에 도착한 베이스캠프에는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라마제를 지낸 전 대원과 지원단. 뒤에 루팔벽이 솟구쳐 있다.
이 루트는 1970년 독일 원정대에 의해 6월27일 라인홀트 메스너와 동생 귄터가, 다음날 펠릭스 쿠엔과 페터 숄츠에 의해 완등되었었다. 그리고 올해까지 쟁쟁한 12팀의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도 재등되지 않고 있다. 우리 팀은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루트를 만들며 오를 것이다.

김미곤, 대원들의 위험 고려해 줄 끊을 결심

대히말라야(Great Himalaya) 산맥의 8,000m급 14개 고봉 중 북서쪽 끝자락의 인더스강이 애돌아 나가는 그 안쪽에 위치한 낭가파르밧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원정대의 꿈이요, 신화로 다가왔다. 현지인들은 정령들의 거처(Dwelling Place of the Fairies)라는 뜻의 디아미르(Diamir?Diyamir)라고 부른다. 그리고 산을 칭하는 표현에 있어 여타의 산들과 달리 많은 최상급의 용어가 따라 붙는다.

1953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될 때까지 31명이라는 가장 많은 등반가가 낭가의 영혼이 되어 ‘죽음의 산(The Killer Mountain)’으로 불렸다. 지질학적으로는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부딪히는 가장 북쪽에 있다. 초등 전 조난의 원인이 되었던 눈사태는 이 불안정한 지각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낭가를 또 ‘술 취한 산(Random walking Mountain)’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특히 남벽을 이루고 있는 루팔벽은 히말라야 산들의 어느 벽보다 높고 가팔라 눈이 붙지 않으며 벌거벗은 산으로, 최고(最高)의 벽이며 로체(8,511m) 남벽과 더불어 최난(最難)의 벽으로 세계 산악인들은 평가했다.

지금 C2(6,090m)로 가는 김주형, 박현수, 박상훈, 그리고 나 4명은 1차 등정시도조를 위한 지원과 2차 등정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균형 감각을 요하는 200m의 칼날 설릉을 지나 운행을 한 지 3시간이 못되어 세락 밑 얼음동굴에 마련된 텐트에 도착한다. 한국을 출발한 지 76일이 지나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BC(3,560m)를 철수할 때다.

광주에서 주관하고 쎄로또레글로벌이 후원한 한국 낭가파르바트 루팔 대장벽 원정대(이성원 대장 외 11명)는 통상 낭가의 등반시즌인 6~8월 초보다 이른, 4월20일에 한국을 떠났다. 원정대는 2000년 11월 동계시즌과 2004년 9월의 두 차례 정찰등반을 바탕으로 루팔벽을 연구했고, 또 횡단등반에 대비해 디아미르벽도 알아야했다. 팀 구성은 작년 로체 남벽 대원을 주축으로 했으며, 대원들은 체력테스트를 거쳐 6개월의 힘든 훈련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이른 출국은 전에 시도했던 팀이 등반기간의 부족과 낙석, 눈사태의 위험에 많이 노출됐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20일에 도착한 BC에는 눈이 1m나 쌓여 있었고, 낮은 고도(3,560m)에도 불구하고 밤 기온은 0℃에 근접했다.

“거시기 해불자.”

이렇게 외치며 곧바로 시작한 등반은 운행 효율을 위해 3개조로 나뉘어 4월27일 C1(5,280m)에 텐트 2동을 설치했으나, 눈사태로 네 번이나 파손된 후에 결국 큰 설동을 파서 캠프를 구축했고, 5월1일 고정로프 4,000m를 연결해 C2(6,090m)를 구축했다.

▲ 세락 밑에 설치 된 C2(6,090m)에서 운행을 준비하는 김주형, 구형준 대원.
올해 낭가의 날씨는 좋지 않은 편이다. 예년 같으면 벌써 설선이 4,800m를 넘었을 텐데 아직도 4,200m대에 머무르고 있고, 북동쪽 멀리 바라다보이는 티벳 고원에는 아직도 하얀 눈바다다. 쓰나미의 영향인 듯싶다.

매일 흐리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야간운행으로 C3(6,850m)는 6월14일, C4(7,150m)는 24일에야 눈벽을 쌓아 올려 바위에 매달리듯 2인용 텐트 한 동을 마련했다. 등반기간이 길어지고 루트에서 눈사태와 낙석에 맞아 대원들의 몸 상태는 날로 악화되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70년 독일팀이 고소포터 15명을 이용해 당시 C3(6,000m)까지 3톤의 물량을 수송한 것과 달리 우리는 대원들이 모든 장비와 식량을 옮겨야한다. 14~18kg 배낭은 힘겹기 그지없고 내의에 똥을 싸면서까지 C4까지 짐을 올렸던 김병찬 부대장, 붙이는 파스로 등짝이 바둑판이 된 막내 상훈이, “이왕 할 거면 큰놈으로 해야제”를 말하며 첫 원정을 따라나선 남수형은 한순간도 앉아 있지 못하고 캠프지를 정리하는 등 팀 원정이란 이렇듯 모든 대원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법이다.

텐트로 기어들어 가 부족한 잠을 청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무전기에서 대장님과 통화하는 우평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급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다. 큰 낙석으로 사고가 났다. 미곤이가 심하다. 그리고 말이 없다. 어떤 상태일까? 머리를 맞았을까?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송형근, 이현조, 김미곤, 주우평은 밤 12시45분에 C4를 출발, 어제 작업해 놓은 로프를 올라 좁은 곳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메르클 린네로 진입해 등반을 계속한다. 7,550m에 도달한 이들은 앞쪽에 걸린 5m의 수직빙폭만 오르면 경사가 죽어드는 설사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7,550m에서 어깨와 왼쪽다리에 낙석을 맞은 김미곤대원을 전 대원이 4일간의 작업으로 4,000m를 재사고 없이 끌어내렸다.
오전 10시45분 분설 눈사태가 나던 쿨와르 위쪽 벽에서 책상 만한 낙석이 떨어져 바로 위 턱에 부딪혀 조각나면서 4명을 덮쳤다. 좁은 홈통은 피할 수도 없었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다시 조용해진다. 빙폭 밑에 있던 현조는 다행히 괜찮았고, 우평이는 허리와 허벅지, 형근이는 어깨를 맞았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 이전에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을 맞은 미곤이가 내는 신음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몸은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구조 헬기는 그 고도까지 올라오지도 못하며 행여 오더라도 바위절벽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미곤이는 생각한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신을 끌어내리려고 이곳 홈통에 있다가는 또 다른 낙석에 모두 몰살당할 것은 뻔하다. 그리고 바위틈새에 박힌 하나의 피톤에 후송작업을 하려고 여러 명이 매달리면 재사고는 자명하다.

이곳은 해가 뜨기 전에 지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어려운 루트는 이를 허락치 않았다. 예전 일본 원정대가 정상으로 가던 4명이 이 지점에서 눈사태와 낙석으로 모두 실종되는 조난이 있었다. 그는 오른쪽 허리벨트에 매달린 칼을 찾는다. 자신 때문에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4명 중 마지막에 묶여 있던 그는 앞줄을 끊어 버리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나머지 3명은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내려갈 것이고. 오른쪽 어깨와 팔을 움직일 수 없어 왼손을 뒤쪽으로 하여 칼을 찾지만 통증만 올뿐 잡히지 않는다. 이때 옆에 있던 형근이가 말한다.

C4 대기중 1g이라도 줄이려고 장갑 라벨까지 잘라내

“우린 함께 올라왔으니까 함께 내려가는 거야. 다른 생각하지 마라”

이때부터 3명은 미곤이를 C4로 끌어내리기 위해 4시간동안 작업했다. 벗었던 장비를 착용하고 약간의 약품을 챙겨들고 C2에서 C3로 출발해 암릉으로 주마링을 한다. 뛰다시피 하여 숨이 목까지 찬다.

다음날 오전 9시 C4 100m 전에서 바라보았을 때 미곤이는 텐트 옆에 앉아 있었다. 이때까지 밑에 있던 우리는 미곤이의 상태를 몰랐다. ‘그래 저 정도면 충분히 베이스캠프로 내려갈 수 있어’라는 확신이 든다. 미곤이가 천천히 줄에 매달려 내려지고 아무 표정도, 말도 없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눈물을 참았다. 고맙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

이제 목표는 바뀌었다. 위로가 아니라 아래로. 저 발치로 보이는 작은 점 베이스캠프까지 사랑하는 동료이자 동지인 미곤이를 데리고 내려 가야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대원 나름대로 약간의 이기심과 자신을 먼저 챙겼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미곤이를 데리고 이 벽을 무사히 벗어나야 한다.

▲ 눈사태와 폭설에도 든든하 C2의 얼음동굴 내부.
대장님의 지휘 하에 전 대원이 각 캠프별로, 또 각자의 임무를 맡는다. 가이드라인 줄을 가지고 내려가 한 피치씩 루트를 정비하는 대원, 미곤이를 내리는 대원, 그와 함께 내려가며 보조하는 대원, 아래 캠프로 먼저 내려가 먹을 것과 음료를 준비하는 대원 등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확보물은 튼튼한지, 혹 중간에서 날이 어두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의 연속이다.

27일, 눈이 약간씩 날리는 가운데 C2까지 내렸다. 이 때까지 미곤이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부목과 매트리스로 칭칭 동여져 줄에 매달린 상태로 대소변을 해결하려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차를 마시며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띤다. 그리고 그는 후에 말했다. C2에 와서야 이제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다음날도 C1으로 작업은 계속됐다. 베이스에서는 들것을 만들어 목동과 키친보이를 데리고 C1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긴 시간, 29일 새벽 1시30분 어둠 속에 수많은 랜턴 불빛이 베이스캠프에 다가섰다. 우리는 서로 안고 울고 또 웃었다. 한 번의 재사고 없이 미곤이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것도 4,000m를, 히말라야 등반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우리는 해낸 것이다.

모두 탈진상태가 됐고 날씨는 계속 흐렸다. 미곤이는 다행히 헬기 대신 말을 타고 길기트 병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온 연락은 어깨는 근육이 파열됐고 발은 골절되어 깁스를 했다고 한다.

▲ 눈사태, 낙석, 그리고 악천후 운행의 대부분은 밤에 이루어졌다.
끝났던 원정이었는데 다시 등반을 준비했다. 베이스캠프의 식량이 부족해 한 끼는 현지식인 차파티로 하고 모자라는 등반용 가스는 현지에서 구입한 큰 통의 가스버너와 석유버너로 준비했다. 끝난 등반 기간을 연장해 파키스탄 관광국에 다시 허가를 내고 비자도 연장했다.

현지 목동과 주민들은 우리에게 얘기한다. 한국팀은 그래도 성공할 것이라고. 10일을 쉰 후, 등정 시도를 위해 먼저 캠프지를 정비해줄 4명이 올라갔으나 다시 내려오고, 다음날도 4명이 출발했지만 3명은 돌아오고 병찬이형만 끝내 C1에 도착해 텐트 한 동을 쳐주었다.

김주형, 송형근, 이현조, 그리고 나 4명이 7월8일 마지막 기회를 움켜쥐려고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캠프지를 재건설하느라 약해진 몸을 더 지치게 한다. 11일 C3에서는 머무르지 않고 필요한 장비만 챙겨 C4에 도착했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분설 눈사태가 덮쳐 매달린 작은 텐트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처음 도착했을 때 이곳의 밤 기온은 시계의 액정이 얼 정도의 영하 25℃를 밑돌았다. 텐트 안에서 눈사태가 덮칠 때마다 등을 벽쪽으로 대고 버텼고, 텐트와 벽 사이에 찬 눈을 퍼내야 했다. 낭가는 우리에게 기회를 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2일 형근이가, 13일 오전 주형이 형이 식량 부족으로 내려갔다. 두 명은 내려가면서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이번엔 느낌이 좋다는 말을 남겼다. 

이제 둘만 남았다. 텐트 위로 후드득 눈사태가 덮친다. 조마조마한 가운데도 현조와 나는 평온함을 찾는다. 정상부 사진을 꺼내어 옳은 루트를 찾고 기억한다. 마지막 캠프에서 4일째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한다. 오늘밤에는 날씨가 흐리고 눈이 오더라도 무조건 위로 간다.
▲ C2 전의 살벌한 칼날 설릉. 처음 오를 때는 말을 탔으나 적응된 후에는 걸어 다녔다.

장비는 6mm 케블라로프 50m, 피톤 10개, 아이스스크류 3개, 비박용 산소, 식량은 사탕 몇 개와 물 한 통, 그리고 카메라와 필름, 개인 여벌 장갑 옷가지를 챙겼다. 오후에 몇 번이고 짐을 챙기다 풀고 필요 없는 것은 제외시킨다. 1g이라도 무게를 줄이려는 현조는 장갑의 라벨까지 잘라낸다.

13일 밤 10시30분, 마지막으로 루팔벽 정상부 사진을 챙기고 내가 먼저 텐트를 나서 주마링을 시작한다. 구간별로 앞뒤 순서를 정하고 작전을 짰다. 구름은 여전하고 눈이 내리고 있다. 우리는 배수진을 친 거나 다름없다. 줄은 50m, 이는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며, 상부 벽 어느 정도까지 가면 오른 루트로는 내려오고 싶어도 그러질 못한다. 무조건 정상을 넘어서 디아미르 베이스캠프로 내려 가야한다.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지만 자신은 있다. 차라리 이 벽을 오르지 못한다면 내 자신은 수치를 느낄 것이며,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머무는 동안 이른 아침 일어나 마라톤을 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현조도 그러는 듯했다. 또 팀은 잔디구장 같은 목초지에서 축구와 족구, 그리고 단체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었었다.

이현조, 함께 오르지 못함에 울먹여

여명이 밝아올 때 우리는 먼저 조가 설치한 고정로프 끝에 도착한다. 현조의 선등으로 빙폭을 넘어서자 쿨와르는 넓어지고 가파른 빙설벽이 펼쳐진다. 연등으로 세 마디를 오르고 가로막고 선 바위밴드를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어렵게 넘어선다. 우리가 있는 고도는 다행히 날이 밝으면서 개였다. 그러나 6,800m 이하는 솜을 깔아 놓은 듯 흰 구름이 자욱하다.

▲ C3 전의 어려운 쿨와르로 진입하는 구형준, 김병찬, 박남수 대원.
쉬지 않고 피켈로 몇 번을 타격해야 들어가는 청빙지대를 한 마디, 가슴까지 차는 설벽을 또 한 마디 더 오른다. 눈 속은 단단한 얼음으로 무너질까 불안하다. 위쪽으로 메르클 샤르테의 안부로 올라서는 곳은 암빙벽이 오버행을 이루고 있다.

햇빛이 람페 눈사면에 반사되어 이젠 덥다. 오전 10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계속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내려갈 것인지. 현조에게 얘기한다.

“ 아무래도 올라가다 비박해야 할 것 같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가 왜 부정적인 질문을 피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비박하지 말고 계속 올라가면 되잖아요.”

그가 당연한 듯 대답한다. 그래 앞으로 가자. 이제 우리만의 루트를 찾아야 한다. 우측으로 메스너 형제가 간 길로 정찰한다. 벽이라 가시거리가 10여m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루트는 우측으로 길게 트래버스하여 남봉(8,045m) 밑을 지나 우회함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BC와 무전교신을 한다. 아래에서는 구름에 가려 우리를 볼 수 없다. 1차 시도 때는 대장님이 반대편 산등성이에 올라 망원경으로 옳은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줬었다. 작년 정찰 당시에 찍은 사진을 보고 10시 방향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하신다. 또 지금부터 산소를 사용하라고 한다. 그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우리는 분명 정상 근처에서 밤을 지새워야 해야할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을 온전히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왼쪽으로 메르클 샤르테가 보인다. 70년 그 날 정상에 선 메스너 형제는 등반한 루트가 아닌 서쪽의 안부 샤르테로 내려와 입은 옷 그대로 비박을 한다. 바람은 차갑고 옷깃을 후벼판다. 영하 30℃는 되는 듯했다. 동생 귄터는 형 라인홀트에게 애원하듯 말을 한다.

“형 담요 좀 줘.”

“담요가 어디 있어?”

“거기 있잖아.”

그들에게는 담요도 등반용 줄도 없었고, 이미 귄터는 고소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으며 환각에 시달린다. 다음날 오전 9시경에 2차로 등정을 시도하는 쿠엔과 숄츠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지점을 지나간다. 라인홀트는 80~100m 거리의 두 명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는 줄이 필요해!”

그러나 외침은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희망을 안겨 주었던 쿠엔과 숄츠는 그들쪽이 아닌 정상으로 향한다. 형제에게 남은 선택은 디아미르 벽으로 하산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힘겹게 내려간다. 끝내 낭가는 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뒤따르던 귄터가 세락의 붕괴로 실종된다. 형은 절규하며 동생을 찾지만 허사다. 라인홀트는 낭가를 벗어나지만 동상으로 발가락을 잃는다.

▲ 빌란트 대암벽을 향해 짐 수송 중인 대원들.
두 번의 정찰과 사진 분석으로 내가 길 찾기에 나으리라 생각하고 선등으로 나섰다. 앞에 보이는 작은 홈통을 이용해 바로 직등해 오른다. 네 마디, 다섯 마디 막힘 없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오르고 피톤을 박으면 현조가 주마링으로 따라온다.

순조롭던 진행이 깨졌다. 박은 피톤이 빠지면서 8m를 떨어진 현조는 엉덩이 부분을 바위에 심하게 부딪혔다. 통증이 심한 모양이다. 걷기에도 불편하다. 하지만 참으며 계속 진행한다.

드디어 벽이 끝나는 모양이다. 가파른 설릉을 따라 남봉 근처의 뾰쪽 바위에 도착했다. 서쪽에 일몰이 지자 곧 어두워졌다. 바람에 세진다. 작은 플라토를 질러 설벽을 올라 정상 피라미드가 시작하는 넓은 설면을 가로질렀다. 이제 정상은 얼마 남지 않았다.

착각이었다. 정상인가 싶어 오르면 밤하늘 밑에 더 높은 곳이 있었고 그렇게 다섯 번을 더 넘었다. 아이스바일 두 자루를 이용해 50m 설벽을 올라 얼굴을 들어올리자 더 높은 곳은 없다. 약간 낮은 듯 10m 거리에 바위가 보인다. 다가선다. 갈라진 바위틈에 피톤이 박혀져 있고 많은 깃발이 매달려 있다.

정상이다. 이제 더 오르지 않아도 된다. 현지시각 10시41분, 정상 기념물로 바위를 한 조각 깨어 담고 바위틈새에 있던 알루미늄 막대를 배낭에 넣었다. 현지시각 밤 10시 41분에 정상에 도착한 우리는 카메라가 얼어 사진을 촬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상에 피톤을 박고 쎄로또레 깃발 두개를 달고 50미터 줄을 사려서 바위위에 올려놓았다.(후에 디아미르측 등정자들이 로프를 확인해줌) 그리고 정상에서 가장 특이해 보이는 알류미늄 막대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디아미르 베이스에서 메스너가 1978년 디이미르벽에 신루트 단독 등반을 마치고 8월 6일 정상에 올랐다는 메모지가 들어있는 것을 알았다. 뒤이어 58분에 현조가 도착했다. 초등 후 35년만에 많은 부분 신 루트를 만들며 올랐지만 우리는 그저 꼭 껴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베이스로 무전을 하고 몇 마디 오고간다. 현조가 형근이와 통화한다.

“친구야, 너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현조는 울고 있다.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고생한 모든 대원이 함께 오지 못한 섭섭함 때문일까. 나는 미안함이 든다. 여기에는 후배들이 왔어야했다. 형근, 미곤, 우평, 현수, 형준, 상훈이. 그러나 지금 두 명이 정상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나머지 대원의 마음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래서 정상은 12명으로 북적댄다. 무전기를 받아 든다.

“카메라가 얼어 정상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추워 빨리 디아미르로 하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료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이 등정보다 기쁜 일

우리는 정상에 가지고 갔던 50m의 줄과 피톤을 박고 쎄로또레 깃발 두 개를 매달았다. 그리고 바로 디아미르쪽으로 뛰어 내려간다. 디아미르쪽 C4는 7,450m에 설치된다. 벌써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 뜨거운 차 한 잔,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텐트를 꿈꾼다. 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두지 않았다. 하산은 정상부 중앙에 오목한 부분을 내려오다 우측으로 트래버스해야 한다. 7,800m에 따라오던 현조가 우리가 만든 발자국에 끊어진 판상 눈사태에 휘말려 내려간다. 쓸리면서 목이 꺾여진 상태로 계속 내려간다.

“현조야, 찍어!”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그는 헤엄쳐서 빠져 나왔다. 빠져 나오지 못했다면 4,000m 디아미르 벽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라도 허비할 수 없다. 7,700m, 내려오다 바위 절벽에 길이 끊어졌다. 다시 되돌아가서 왼쪽으로 돌아야한다. 하지만 너무 힘들다.

10m 높이로 뛰어내리면 눈사면에 내려갈 것 같다. 뛰었다. 아이젠이 바위에 긁히는 몇 번의 소리에 몸이 뒤집혀 구르기 시작한다. 한참을 내려간다. 언제나 멈출까. 손에 잡고 있던 바일은 날아가 버리고 아이젠이 달린 발로 눈을 찍지만 멈추지 않는다. 벙어리 우모장갑이 벗겨져 나간 왼쪽의 맨손으로 몸이 구르는 리듬에 맞춰 눈에 쑤셔 넣었다. 멈췄다. 안경과 랜턴이 없어졌다. 현조가 있는 곳까지 도착, 그가 비치는 불빛을 따라간다.

▲ 8,000m 높이의 설벽에서 남봉으로 향하는 필자. 왼쪽 뾰족한 바위를 지나면 벽구간은 끝난다.
사면 저쪽 편에 불빛이 보인다. 텐트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2시간을 갔는데 텐트는 다가서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이는 것일까. 그 불빛은 텐트가 아니라 정상으로 가는 등반가들의 랜턴 불빛이었다는 것을 디아미르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우리도 환각에 시달렸다.

운행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현조는 앉아 다리를 떨며 졸고 나는 서서 1시간을 졸았다. 너무나 춥다. 드디어 날이 밝아온다. 현조는 이날 오후 4시에 7개팀에 머물고 있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떨어지면서 어깨를 다친 나는 C2에 하루를 머무르고, 16일 오전 10시40분에 도착한다. 다음날 산을 돌아온 대장님과 형근이와 재회했다.

그곳 베이스캠프에서 우리를 미친 녀석들(crazy climbers), 또는 제2의 메스너라고 불렀고, 귀빈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디아미르측에서 오른 팀이 우리가 정상에 두고 온 로프를 확인해 주었다. 가지고 온 알루미늄 막대는 78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디아미르벽을 신루트로 오르고 정상에 두고 온 캡슐로 확인됐다.

스페인팀 본부텐트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한 스페인 대원이 말한다.

“너는 참으로 강한 등반가이며 루팔벽을 해냈다.”

현조가 대답한다.

“아니다. 강하면 우리 팀이 강한 것이며, 루팔벽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해낸 것이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귀국하면서, 아니 하산하면서부터 나는 허무함을 느낀다. 낭가는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낭가'와 내 마음속에 그린 '환상의 낭가'가 있다. 내가 오른 낭가는 환상의 낭가다. 그 산은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하다. 나에게 진정한 낭가는 무엇일까?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것이 없었다면 정상을 오른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어떤 기쁨이 있으랴. 그것은 다름 아닌 동료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인천공항에서 목발을 짚은 미곤이가 두살배기 아들 종윤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루트 우측에 단독으로 새로운 루트를 내려고 온 슬로베니아의 수퍼 알피니스트 토마스 휴마(Tomaz Humar.37)가 베이스캠프로 들어왔다. 그는 이미 아마다블람 북동벽 신 루트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황금피켈상을 받았으며, 눕체 북서벽 신루트, 다울라기리 남벽 단독 신루트 개척 등 현재 세계에서 활동하는 가장 뛰어난 히말라야니스트로 평가받는다.

그의 요청에 따라 우리가 설치한 고정로프, 캠프지, 침낭, 식기세트를 철수하지 않았다. 우리 팀이 베이스캠프를 철수한 후 휴마는 새로운 루트로 6,400m까지 올랐으나 길이 막혀 6,000m에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해 8월10일 6시경 헬기에 의해 구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창호 등반 부대장 서울시립대OB.쎄로또레 등산아카데미
사진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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