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다물게 하는 도가니찜의 힘
김대우의 맛집기행(7) 충무로 황소집의 도가니찜
가끔 TV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굳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프로골퍼나 이십대 초반 나이에 인터넷 관련회사를 몇 천만 달러에 팔아넘기는 천재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근래 들어 성공하는 사람들의 나이가 점점 낮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런 사람들의 기분이랄까, 느낌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혼자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삼십대 초반까지도 뭘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주제였다. 그런 시기에 우연히 시나리오 공모에 응모하게 되었고 덜컥 가작에 당선하게 되었다. 돈도 생기고, 시상식에도 가서 사진도 찍고 했지만, 그런 식으로 인생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여전히 인생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공모 심사를 맡으셨던 K감독이 전화를 하셔서 바로 이 황소집에서 저녁을 사주셨다. 만나긴 했지만 감독님은 날 보자마자 실망하신 눈치였다. 패기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신념이 느껴지지 않는 나에게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이다.
몇 마디 작품에 대한 덕담을 하셔서 듣고 있는데 도가니 찜이 날라져 왔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가니 찜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한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렇게 한심한데, 이분은 얼마나 더 그럴까.’ 기왕에 사주시는 저녁이니 나는 수저를 들어 도가니찜을 먹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
도가니는 질기거나 퍽퍽한 느낌이 전혀 없이 쫄깃하면서도 고소했다. 말캉한 연골 부위 사이에 얇게 육질이 섞여 있어서 씹는 맛 또한 일품이었다. 잘 익은 도가니를 새콤한 간장에 찍어 먹으면 몇 번 씹기도 전에 입속에서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도가니를 다 먹어 갈 때쯤이면 걸쭉한 육수에 국수를 곁들여 끓여준다. 이 국수를 또 간장에 살짝 찍어 잘 익은 김치와 함께 정신없이 먹어댔다. 양도 푸짐한 데다 K감독님이 계속 추가를 하셔서 끝도 없이 먹어댔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음식에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실내는 단체로 온 회사원들의 왁자한 말소리와 담배연기로 넉넉하게 무르익고 있었고 K감독님은 혼자서 소주를 곁들이며 나를 물끄러미 보고 계셨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친척이나 선배가 아닌) 나의 능력을 칭찬하며 사주는 저녁식사였는데 나는 그만 도가니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계산을 하는 감독님을 기다리며 밖에 서 있는데 정말이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도가니가 맛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한마디도 안하고 먹기만 해댔단 말인가.
식당을 나온 K감독님은 말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약간 얼큰해진 기색의 S시나리오 작가님이 걸어오시다가 감독님과 아는 척을 하셨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시다가 흘낏 나를 보신 S작가님이 물으셨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야?” “아, 여긴 김대우라고, 시나리오 작갑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작가라.... 나는 허리를 숙여 시나리오 작가로서 S작가님께 인사를 했다. 다시 두 분은 대화를 나누셨고, 나는 길에 뻘쭘히 서 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도 황소집에 가면 도가니찜을 시켜놓고 동행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다들 웃기도 하고 나를 ‘어영부영 도가니찜 먹고 작가 된 사람’이라 며 놀리기도 하지만 막상 도가니찜이 나오면 다들 말이 없어진다. 나도 K감독님처럼 술잔을 홀짝거리며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본다.
[무비위크] 2007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