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미술작품에 대한 저항
조중걸 예술사 이야기,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프로네시스, 2007
당신은 병든 행복, 건강한 불행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파리3대학과 예일대학 등에서 서양예술사, 문학사, 음악사, 수리철학 등 다양한 방면을 공부한 저자는 단연 후자라고 말한다. “나는 단지 그것(건강한 불행)이 옳다는 말밖에는 다른 어떤 말도 못하겠다. 외로움과 소외가 힘들고 두렵더라도 이 키치처럼 더러운 것은 아니라는 말밖에는.”
저자가 이토록 저주하는 ‘키치’란 무엇일까. 키치는 통상 고급품을 흉내낸 싸구려 미술작품을 뜻하지만, 저자는 이를 ‘삶의 양식’으로 확장시킨다. 책 서두에 인용된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키치는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자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고 ‘총체적인 순응주의’다.
키치는 노동을 통한 자아성취가 불가능한 근대에 싹트기 시작했다. 이제 대중은 노동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 세계와 대면할 수밖에 없었고, 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소비하기 좋은 얄팍한 예술작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범용함이 탁월함을 넘어선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해줄 달콤한 키치를 제공하려 했지만, 영웅적인 예술가들은 끝없이 삶의 진실을 깨우쳤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구태의연함을 제일 처음 발견한 뒤 이를 파괴하려 했고, 인상주의자들은 관습에 물든 자아를 지웠다. 현대예술가들은 연극에서의 소격효과를 통해 상투성과 환상성을 걷어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통해 일말의 감상주의마저 배격했다. ‘키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로 본 근·현대 예술사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술가들에 대한 시니컬하면서도 거침없는 평가가 눈에 띈다. 저자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은 불편할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 2007년 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