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공포를 달래는 순대국
김대우의 맛집기행(8) 뱅뱅사거리 서초순대국의 순대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의 겨울이었다.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자기 아버지가 ‘가게’를 여는데 도배를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이었는데 갑작스런 사정 파동으로 옷을 벗게 되었고, 구로구청 앞에 사법서사 사무실을 열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전혀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도배를 부탁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친구의 아버지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도배하는 날은 정말이지, 진저리 쳐지게 추운 날이었다. 도배지와 붓 따위를 사 나르는데 이미 우리 세 명은 몸이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도배지에 풀을 바르면 손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였으니까. 가게는 낡고, 작고 초라했다. 지은 지 수십 년이 넘은 건물은 벽이 울퉁불퉁해 초배지를 발랐는데도 종이가 잘 붙지 않을 정도였고 낡은 미닫이 유리문 틈으로는 찬바람이 씽씽 들이닥쳤다. 그런데도 친구의 아버지는 싱글싱글 웃으며 농담도 하시고, 우리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꾀도 부리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마냥 신기했다. 생각해 보라, 웃을 일이 하나라도 있는가. 천직으로 생각한 직장에서 쫓겨났고, 낡은 공간을 하나 세내어 해보지도 않은 일을 시작해야 하고, 돈을 아끼려고 아들놈과 그 친구를 불러 도배를 하는데 날씨까지 안 도와주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친구 아버지는 내가 도배지를 비뚤게 붙이기라도 하면 깔깔대고 웃으시면서 놀리기까지 하셨다. 춥고 긴 하루가 지나고 어두워져서 알전구를 켤 즈음 도배는 끝났다. 가구하나 없이 사방이 도배지로 발라진 공간을 둘러보면서 말을 잃고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쾌활한 말투로 말하셨다. “이거 봐라. 이렇게 멀끔하잖니!”
그리곤 우리를 구로시장 안 허름한 순대국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추위에 얼어붙은 친구와 나는 국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어댔다. 그때 처음으로 순대국을 먹어보았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최근에 두 번이나 구로시장을 헤매었지만 끝내 그 집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집 맛과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식당이 있어 소개한다.
서초 순대국은 택시기사들 사이에 소문이 번져서 유명해진 집이다. 순대와 내장, 머리고기를 푸짐하게 넣고 끓인 국이 깊고 구수한 맛이 나면서도 뒷맛이 깔끔해 순대국에 편견이 있는 이들에게 꼭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벽에는 양념을 넣는 순서며 그 양까지 참견하는 ‘매뉴얼’이 붙어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음식에 자부가 강한 식당이다.
가끔 이 식당에서 순대국을 먹다 보면 그 겨울 도배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때 친구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나는 이렇게 겁이 많은데, 그는 어쩌면 그렇게 대범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쳐들어오는 백만 대군 앞에서 보다도 더 무서웠을 텐데, 인생의 공포란 것이 훨씬 더 무서운 건데, 그런 생각도 해본다.
친구 아버지는 몇 년 전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임종 직전 방문했을 때 앙상하게 마른 육체에 형형한 눈빛만 남아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고 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물어보고 말았다. “아버지. 무섭지 않으세요?” 아버지는 우는 나를 한동안 놀리시더니 이렇게 말하셨다. “아니, 무서울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아. 다만 기다리는 게 좀 지루하다.” 나도 눈물을 닦고 아버지에게 씩 웃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무비위크] 2007년 2월 5일
동시에 저와 젤 친한 친구녀석과의 작은 추억이 담겨있는 음식이기도 하구요..
일 시작하기전, 뱅뱅 사거리에 한번 나가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