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은 인생을 타고 흐른다
김대우의 맛집기행(최종회) 명동 개화의 자장면
이 세상에 자장면처럼 그 맛을 논하기 어려운 음식이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장면의 맛이 복잡하고 미묘해서도 아니고, 퓨전 요리처럼 그 평가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서도 아니다. 바로 자장면은 ‘미각의 세계’가 아니고 ‘상황의 세계’에 속한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생각해보라,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는 어느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로 노동을 했다고 치자. 점심시간에 그 일이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직업인 고참을 따라 들어간 중국집. 자장면이 놓이면 안경에 김이 확 서리고, 고참은 물 컵에 가득 따라 놓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나무젓가락을 쪼갠다. 아르바이트생도 고춧가루를 약간 뿌리고 비벼서 뜨거운 자장면을 한 입 빨아들인다. 미래에 대한 불안마저 잠식하는 그때의 자장면 맛을 어떻게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겠는가. 자장면이란 그런 음식이다.
그뿐일까.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와서 먹은 자장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굶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친구가 사준 자장면, 가난한 신혼부부가 처음으로 작은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고, 하루 종일 신이 나서 청소를 하다가 시켜먹는 자장면들은 어떻게 맛으로 평가하겠는가. 그때의 사정과, 그때의 마음과, 그때의 눈물이 포함되어야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초호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이것저것 고급 요리를 잔뜩 시켜먹고 체면상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맛보기용 반 그릇짜리 자장면. ‘식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나마도 기름진 배에 들어가지 않아 남겨지는 자장면. 그 자장면의 맛이 아무리 좋은들 누가 느끼겠는가.
이렇듯 자장면의 맛을 평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가당찮은 느낌마저 드는 행위지만 한국의 음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메뉴라는 점도 부인하기 어려워 한 집을 소개하고자 한다. 명동 중국대사관 부근에 있는 ‘개화(02-776-0580)’에서 먹을 수 있는 자장면이 그것이다. 이 집의 장점은 우선 소스에 있는데 기름지고 맛깔스러우면서도 ‘청결감’이 돋보인다. 흔히 동네에서 먹는 자장면의 소스에서 느껴지는 ‘잡탕스러움’이, 이 집 자장면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자장면 소스는 조금만 얹혀 나오지만 비벼보면 한 그릇의 면을 아쉬움 없이 비울 수 있는, 다소 뻑뻑한 듯 끓인 한 가지와 약간 싱거운 듯하면서 넉넉한 양의 녹말을 풀어 고소한 맛을 살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개화의 자장면은 후자에 속한다. 전자의 중국집도 많이 찾아 다녔지만 다들 맛이 변해서 같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나도 기억에 남는 자장면이 있다. 외국을 떠돌던 시절 우연히 교민 체육대회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축구시합이 토너먼트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하프타임에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운동장으로 들어가 연습하는 선수 틈에 끼어서 공을 차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어떤 중년남자가 다가오더니 시합이 있는데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하냐고 나에게 호통을 쳐댔다. 나는 금방 눈치를 채고 사과를 했고, 그 교회 팀에 끼어서 시합에 출전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나도 여러 골을 넣었고 팀은 결승까지 올라갔다.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나에게 호통을 친 장로님은 흐뭇해서 선수들을 이끌고 한인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 식당은 특이하게도 자장면을 팔고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이 장로님과 그날 있었던 시합에 대해 떠드는 동안 부정 선수이자 용병인 나는 구석에서 자장면을 후루룩 거리며 먹은 기억이 난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보지만 맛있었던 기억밖엔 나질 않는다. 자장면은 그런 음식이다.
[무비위크] 2007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