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w! 그리스 신화에도 ‘미친 소’ 있었네
신화 속 고삐 풀린 소 테세우스가 제압
인간과 신의 쇠고기 협상은 당당했을까?
김원익(문학박사, 신화연구가)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김종삼의 시 ‘묵화墨畵’)
소는 가족이다. 힘센 농부다. 듬직한 맏아들이다. 아침 일찍 들에 나가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온다. 고단한 하루. 벌컥벌컥 목을 축인다. “딸랑~딸랑~” 맑은 워낭소리. 입가에 흰 거품이 인다. 땡볕에 달아오른 목덜미. 할머니가 가만히 그 위에 쪼글쪼글한 손바닥을 얹는다. “얘야, 오늘 하루 정말 욕 봤구나~”
소는 맑은 눈으로 그윽이 할머니를 바라본다. 해는 이미 지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리는 저녁. 할머니와 소는 말이 없다. ‘함께’ 보낸 노동의 하루. 부은 발잔등을 서로 바라본다. 소도 늙고 할머니도 늙었다. 외롭다.
소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소는 우선 인간의 다정한 친구이며 영물이다. 제우스는 어느 날 아내 헤라신전의 사제 이오와 ‘몰래 사랑’에 빠진다. 헤라의 육감이 그걸 놓칠 리가 없다. 즉시 그들의 불륜현장을 급습한다.
제우스라고 어디 만만한가. 제우스는 헤라가 오는 것을 알고 잽싸게 이오를 하얀 암소로 둔갑시킨다. 헤라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체 남편 제우스에게 조른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 암소를 나한테 장난감으로 줘요!” 제우스인들 아내의 부탁인데 어쩌겠는가? 제우스는 결국 아내에게 암소를 넘겨준다. 역시 여자가 한수 위다.
제우스는 바람둥이다. 이번엔 소아시아의 공주 에우로페의 아름다운 모습에 애가 탄다. 마침 에우로페는 황소를 좋아했다. 제우스는 즉시 늘씬한 황소로 변해 그녀 앞에 “짠~”하고 나타난다. 에우로페는 그만 기쁨에 겨워 눈이 휘둥그레진다. 황소의 엉덩이를 쓰다듬어본다 입을 맞춰 본다하며 맛이 뿅 간다. 그러더니 마침내 소잔등에 올라탄다. 바로 그 순간 바로 모든 게 끝난다. 여자들이 압구정동에서 ‘야타족’ 승용차에 타면 그 다음은 보나마나다.
소가 머문 곳에 도시 ‘테바이’ 건설
황소는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크레타 섬을 향해 쏜살같이 헤엄을 쳐 달려간다. 크레타 섬에서 에우로페는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 등 삼형제를 제우스에게 낳아주었다.
에우로페가 제우스에게 납치당하자 아버지 아게노르왕은 오빠 카드모스에게 동생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못 찾으면 아예 돌아오지 말라고 다짐한다. 소아시아에서 본토로 건너온 카드모스는 동생을 찾아 헤맸지만 매번 허탕만 친다.
설령 동생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신들의 왕 제우스의 연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데려올 수 있겠는가? 카드모스는 적당한 때 동생 찾기를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본토에 정착할 마음을 먹는다. 바로 그 순간 아폴론이 제우스의 명을 받들어 그에게 신탁을 내린다. “멍에를 진 적이 없는 소를 만나거든 따라가다가, 그 소가 쉬려고 머무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것이다. 그는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소를 만나게 되고, 소가 머문 곳에 테바이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에우로페의 세 아들 중 하나인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되는 과정에도 황소가 등장한다. 하지만 화려하게 등장한 이 황소는 마지막에 미친 소로 전락한다. 미노스는 자신에게 크레타 왕국을 맡겨준 포세이돈 신이 그 징표로 곧 황소를 내려줄 것이라고 형제들에게 큰소리친다.
그는 포세이돈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바다에서 황소가 솟아나게 해주면 그것을 다시 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포세이돈 신은 그 맹세를 믿고 기가 막히게 멋진 황소를 보내준다. 하지만 미노스는 왕위에 오르자 마음이 달라진다. 그는 훌륭한 종자를 번식시키려는 욕심으로 포세이돈의 황소는 우리에 가둬놓고 다른 보잘 것 없는 황소를 바친다. 포세이돈 신은 펄펄 뛰며 곧바로 그 황소를 미친 소로 만들어버린다. 미친 황소는 우리를 뛰쳐나가 입에서 불까지 뿜으며 크레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마디로 그리스 신화판 불가사리다.
많은 영웅들이 이 미친 황소를 잡으려했지만 실패했다. 마침내 영웅 헤라클레스가 에우리스테우스왕의 명령으로 이 미친 황소를 잡으러 크레타로 건너왔다. 이것은 그의 유명한 열두 가지 모험 중 일곱 번째 모험이다. 헤라클레스는 초인적인 괴력으로 황소를 잡아 길들인 다음 소잔등을 타고 바다물살을 가르며 본토로 건너왔다. 헤라클레스에게서 황소를 받은 에우리스테우스왕은 자신의 수호신 헤라에게 선물로 바쳤다.
헤라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 황소는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헤라클레스의 손으로 잡은 거였기 때문이다. 헤라는 결국 황소를 다시 놓아주었다. 고삐 풀린 황소는 아테네 근처 마라톤 지역을 휘젓고 다니다가 나중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손에 잡혀 죽었다.
크레타의 미친 황소 이야기는 ‘광우병 공포’와 닮은꼴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생까지도 광우병걱정에 잠 못 이루고 있다. 정부가 부랴부랴 나서서 그 불을 꺼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다. 오죽하면 ‘광우병 어록’까지 생겨났을까? 국회에서 ‘소고기 청문회’가 열렸지만 그것도 별무소용이다.
소는 초식동물이다. 풀과 곡식을 먹는다. 하지만 광우병 소는 ‘동물성 사료’를 먹여서 생긴다. 그 사료는 ‘병든 소나 죽은 소를 갈아’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바로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 신의 뜻을 어겨서 미친 황소가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다룬 <오디세이아>에는 또 다른 소 이야기가 나온다. 바다에서 방랑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은 트리나키에라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 기항한다. 오디세우스는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로부터 고향에 돌아가려면 섬에 살고 있는 소를 절대로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는다.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에게 그 경고를 주지시켰지만, 그가 잠든 사이 부하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소들을 잡아먹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다. 쇠가죽이 마치 살아난 듯이 기어 다니고, 꼬치에 구운 고기와 남은 생고기에서 소 울음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살아있는 소가 아니라 죽은 소가 미친 것이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서둘러서 짐을 꾸려 섬을 떠나지만 곧이어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오디세우스만 빼고 모두 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
[img1]소뼈는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것
소의 특정 위험부위만 문제겠는가? 어디 미국소고기만의 문제겠는가? 유럽소나 호주소는 얼마든지 먹어도 안전한가? 모든 한우는 과연 우리나라 순수사료만 먹여 키우는가? 이 땅에서 난 신토불이 곡식들로만 사료를 만드는가? 미국 옥수수나 다른 외국 곡물로 만든 사료를 먹이지는 않는가? 그렇다고 다른 먹을거리는 안전한가? ‘납 꽃게’ ‘농약콩나물’ ‘쥐고기 새우깡’…이런 것들은 먹어도 괜찮은 것인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는 이명박 정부가 미국과 벌인 소고기 협상과 비교되는 협상이 하나 등장한다. 인간이 창조되고 얼마 되지 않아 메코네 라는 곳에서 소를 놓고 신들과 인간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인간과 신이 각각 소의 어느 부위를 먹을지 정하는 일이었다.
이때 심판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게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는 인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기발한 속임수를 썼다. 자기가 직접 진흙을 빚어 만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무척 컸기 때문이다. 그는 소를 잡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고기와 내장 그리고 비계를 소가죽으로 싸서 그 위에 위장을 얹어 놓았다. 다른 하나는 앙상한 뼈를 하얀 기름으로 보기 좋게 쌌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보이며 먼저 선택하게 했다. 제우스는 당연히 겉이 번지르르하게 보기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했다. 기름을 걷어 내고 안에 들어 있는 뼈를 확인하고 분노한 제우스는 그 앙갚음으로 인간에게 불을 주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번개에서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갖다 주었다.
이명박대통령은 틈만 나면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한없는 ‘국민(인간)사랑’을 뜻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친 벌로 코카서스 산 절벽에 3000년이나 묶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제우스는 아침마다 독수리를 보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하였다. 하루 종일 파 먹힌 간은 밤사이에 또 다시 돋아났다.
이명박 정부는 과연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에 어떤 생각으로 나섰을까? 프로메테우스처럼 제우스(미국)와 당당하게 맞설 자세로 협상테이블에 나섰던 것일까? 국민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내놓겠다는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아니면 제우스가 무서워 말도 한번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테이블에 앉자마자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렸을까? 과연 대한민국에서 미친 황소를 잠재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같은 영웅은 없을까?
[주간 동아] 2008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