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선언 이건희 회장, 삼성공화국의 제우스
삼성그룹 얘기할 땐 늘 ‘신화’ 수식어
변신의 귀재, 숱한 도전과 응전 닮은 꼴
김원익(문학박사, 신화연구가)
나 여기 앉아 인간의 모습을 빚노라
(제우스) 네 모습을 본떠서
나와 같아야 할 한 종족을
고통 받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고
그리고 나처럼 너를 존경하지 않을 종족을.
-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에서
‘삼성신화 계속’, ‘삼성신화를 파헤친다’, ‘삼성신화는 깨지나’, ‘삼성신화 해체’, ‘무 노조 삼성신화’…. 삼성그룹을 이야기할 땐 늘 ‘신화’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그냥 ‘삼성’이라고만 말하면 뭔가 빠진 것 같다. 왠지 ‘신화’가 들어가야 자연스럽다. 그래서 토론회 단골주제도 ‘한국사회와 삼성신화’이다. 서점의 잘 나가는 책들도 ‘삼성신화의 원동력 특급 인재경영’, ‘삼성신화는 없다’식으로 꼭 ‘삼성신화’를 걸고 넘어간다.
삼성 그룹은 그리스 신화와 닮은꼴이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와 10년 전쟁을 벌인 끝에 ‘신들의 제왕’이 된다. 크로노스도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다. 이는 신들의 세계도 어김없이 ‘권력이양 과정은 순탄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제우스이다. 그는 1993년 “삼성은 지난 1986년에 이미 망한 회사”라며 ‘신경영’을 선언한다. 과거 아버지시대와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는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으로, 처음부터 잘못 태어난 회사, 삼성물산은 전자와 종합화학을 합쳐서 나눈 정도의 병”이라고 병명까지 언급한다.
변신능력은 시대변화 최선의 생존전략
제우스가 아버지의 티탄시대를 마감하고 올림포스의 새 시대를 선포한 것과 유사하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부터 ‘신경영’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된 시점인 1996년까지의 기간도 제우스가 구세대 티탄족과 싸운 10년 전쟁과 일치한다.
이건희회장 신경영 핵심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것이다. 그는 우선 자신부터 변하라고 주문했다. 변하기 싫은 사람은 변하지 않아도 좋지만 ‘남들 뒷다리만 잡지 말아달라’고 했다.
제우스도 변신의 귀재이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그 현란한 변신의 재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백조, 황소, 여자의 남편, 심지어는 황금 소나기로도 변신했다. 제우스의 다양한 변신능력은 바로 변화를 향한 갈망을 상징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호족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20여명이나 되는 부인을 얻었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방신 제우스도 토착 신을 흡수․통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우스의 빼어난 변신능력은 바로 시대변화에 대응하는 최선의 적응능력이자 생존전략이었다.
제우스는 하늘의 신이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도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아들이다. 3대가 모두 하늘을 지배하는 신들이다. 제우스의 무기는 번개와 천둥이다. 그만큼 제우스는 결단력이 빠르다. 한 번 결심하면 번개처럼 결행한다. 제우스의 새 독수리도 그의 단호한 성격을 대변한다. 독수리는 조용히 하늘을 선회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는 순간 쏜살 같이 하강하여 먹이를 낚아챈다.
‘별 셋’을 뜻하는 ‘삼성’이라는 그룹 이름도 하늘이 배경이다. 하늘의 신 제우스처럼 이건희 회장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독수리처럼 놓치는 법이 없다. 그는 틈만 나면 사원들에게 ‘5~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고민하라’고 외쳤다. ‘기회를 선점하라’고 다그쳤다. 이른바 스피드경영이다.
그는 1991년 과감하게 LCD사업을 미래사업으로 설정하고 반도체 사업으로 남긴 이윤을 그 쪽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LCD가격이 절반으로 내려가 적자가 눈 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도 그의 ‘LCD 프렌드리’ 정책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결국 LCD사업은 1997년까지 만성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LCD사업은 IMF사태가 터지면서부터 대박이 터졌다.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 엄청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다. 제우스의 신속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우라노스가 낳은 12명의 아들 중 막내다. 제우스도 크로노스가 낳은 3형제 중 막내다. 삼형제가 등장하는 동화책을 보라. 막내는 항상 처음에는 온갖 천대와 질시를 받는다. 하지만 끝내는 위기에 빠진 형제와 가족을 구한다. 제우스도 그랬다. 크레타 섬에서 부모 없이 유모 밑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제우스는 결국 형제자매를 구하고 신들의 제왕으로 우뚝 선다.
이건희 회장도 3형제 중 막내다. 그는 갓난아기 때는 자기를 키워준 친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국내에서 무려 다섯 군데의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는 일본으로 유학 갔다. 그는 그곳에서 둘째 형과 일본인 가정부와 함께 지냈다. 그의 아버지 이병철 회장도 막내다. 이것도 우연일까?
한때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에 형제자매들과 아무 잡음 없이 재산분할을 끝냈다. 그건 과감하게 자신의 욕심을 버린 이건희 회장의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7년 IMF사태가 닥치자 이건희 회장의 ‘내려놓음’은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세계적인 투자회사 골드먼삭스의 존 코자인 회장이 그를 찾아와 협상을 벌인다. 그때 그는 과감하게 ‘삼성전자와 핵심 전자 계열사, 삼성 생명을 제외하고 그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고 말한다. 삼성이 IMF사태를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이건희 회장이 ‘버림의 미학’을 실천했기에 가능했다.
제우스는 한 때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 테미스가 불길한 예언을 한다. 제우스와 테티스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들은 힘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몇 배 능가할거라는 예언이었다. 깜짝 놀란 제우스는 정말 쿨하게 하루아침에 테티스를 깨끗하게 단념한다. 제우스는 대의를 위해서는 사랑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범했다.
‘폭풍노도의 핏대’ 포세이돈이라면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결단이다. 포세이돈이라면 사랑에 매달리다가 결국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제우스가 얼마나 옳은 판단을 내렸는지는 나중에 드러난다. 테티스는 제우스의 중매로 보통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하는데 나중에 트로이 전쟁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낳는다. 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 정도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테티스가 제우스나 다른 신들과 맺어졌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아들이 태어나 제우스의 권력에 두고두고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 반도로 남하한 이방신 제우스가 맨 처음 한 일은 지금의 국가정보원격인 신탁소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태양신 아폴론에게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성소였던 델피 신탁소를 접수하도록 명령한다. 모든 권력은 결국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승리한다. 아폴론은 무력으로 델피의 신탁소에 침입해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가이아 여신의 충복 왕뱀 피톤을 활로 쏘아 죽이고 자신의 심복 피티아를 여사제로 삼는다.
이건희 회장도 정보력을 장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취임 초기인 1987년 ‘그룹 경영의 40%가 비서실에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서실을 중시했다. 삼성그룹 비서실이 그에게 하루 보고하는 정보는 100여 쪽이나 된다. 청와대 비서진들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른바 ‘가신그룹’으로 불리는 비서실은 구조조정본부를 거쳐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여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 전략기획실의 이학수 실장은 이건희 회장의 ‘복심’이자 ‘그룹의 2인자’로 바로 삼성의 아폴론이다.
티탄신족을 물리치고 신들의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제우스는 크고 작은 내우외환에 시달린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자기 자식인 티탄신들을 자기 몸 속 가장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둔 손자 제우스가 아주 못 마땅했다. 티탄신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저질렀어도 가이아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 아닌가? 가이아가 몇 번이나 그들의 조건 없는 석방을 부탁해도 제우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노한 가이아는 혼자서 24명의 거인족 기간테스를 낳아 제우스를 습격한다. 제우스는 이들의 공격으로 한때 궁지에 몰리기도 하지만 구원투수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자 가이아는 이번에는 타르타로스와 어울려 괴물 티폰을 낳아 제우스를 압박한다. 티폰은 지상의 어떤 산보다도 거대한 몸으로 머리가 하늘의 별들과 부딪힐 정도였다. 제우스는 그들의 힘에 밀려 한 때 포로가 되기도 하지만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번개를 날려 티폰을 에트나산 밑에 처박아 버렸다.
경영일선 완전 퇴장? 언젠가 화려하게 복귀?
제우스에게 가장 치명상을 입힌 것은 아내 헤라가 아폴론과 포세이돈을 부추겨 일으킨 쿠데타였다. 워낙 급작스럽고 은밀하게 모의한 쿠데타라서 제우스는 그들의 포로가 된다. 100군데나 매듭이 묶여 포박된 채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쿠데타가 성공한 줄 알고 안심한 신들은 권력배분 방식을 놓고 토의하다가 급기야 싸움을 벌인다.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우연히 사태를 눈치 챈다. 그녀는 재빨리 타르타로스에 있던 손이 100개나 달린 아이가이온을 데려와 단박에 제우스를 구해준다. 테티스는 한번 버림받은 쓰라린 경험이 있는데도 제우스가 퍽이나 좋았던 모양이다.
기간테스와 티폰의 습격 장면에서 IMF사태 등 그동안 삼성의 여러 가지 내우외환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헤라의 쿠데타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연상시킨다. 그는 왜 자신이 모시던 가장(?)을 고발했을까? 그는 왜 삼성과 ‘평생 싸우겠다’고 하는 것일까? 그의 분노의 뿌리는 과연 뭘까? 헤라가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제우스의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이학수 부회장과 함께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동반사퇴 한다고 발표했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은 두 번이나 신들이 스스로 세운 ‘올림포스 헌법’을 어기고 하늘궁전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다시 화려하게 복귀한다. 제우스도 숱한 곤경에 처해서도 한 번도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끝내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과연 이건희 회장은 이대로 사라질까? 그의 말대로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퇴장할까? 아니면 아폴론처럼 언젠가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까? 제우스처럼 훌훌 털고 일어설까?
[주간 동아] 2008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