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인숙을 만나다
원재훈/시인
인왕산을 내려오는 길에 기러기를 만났다. 노부부가 사는 숲 속 오두막에 물을 얻어먹으려고 들렀다가 우연히 본 기러기였다. 오리도 아니고 기러기가 왜 민가에서 오리처럼 살고 있나 싶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러기였다. 기러기에게는 기구한 운명인데, 날개가 있는데 날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는 새의 대명사가 기러기다. 더구나 기러기는 가을에 오고 봄에 날아가는 철새다. 자기 영역을 죽을 때까지 지키는 텃새보다는 철새가 ‘멀리 날아간다’는 날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하지만 숲 속 오두막 노부부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기러기는 ‘멀리 날아가기’를 잃어버렸다. 한번 용기를 내서 날아보라고, 기러기에게 말했다. 그 녀석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멀뚱하니 마당의 모이를 쪼며 왔다갔다한다.
“그래도 여기에서 저기까지는 후두둑 날아가.”
할머니는 좁은 마당을 겨우 오리처럼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서 말했다. 그 좁은 마당을 나오지 못한다면 녀석은 영원히 그렇게 살다가 갈 것이다. 저 기러기를 기러기라고 부르는 일이 과연 옳을까. 짧은 순간 마른 목을 적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시달렸다. 내가 혹시 저 기러기와 같지 않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저런 지경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생이 내게 준 휴가
작가 김인숙(金仁淑·45)이 어느 날 문득 중국으로 건너가 3년을 넘게 살다가 쓴 책인 ‘제국의 뒷길을 걷다’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얘기다. 다 읽고 나니 책을 읽기 전 이 책이 김인숙의 베이징 여행기라는 선입관을 잊게 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본 기러기가 생각났다.
인민해방군 손에 이끌려 사상개조를 받은 늙은 푸이가 중국의 새로운 진시황인 마오쩌둥의 사진을 우두커니 쳐다보는 사진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하늘을 보는 심경이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제국의 뒷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이 책은 마지막 황제 푸이의 절망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더 깊은 절망이 조화롭게 슬픈 소설이다.
그 슬픔은 이미 지나간 한 인물, 중국의 황제라는 거대한 거인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가 그 거대한 동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시정바닥을 끌려다니는 슬픔이다. 시정바닥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나 혹은 인간들의 슬픔이기에 책의 문장들은 읽히면서 드문드문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 책에서 말했다.
‘모든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다.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이 완전히 다르게 구성해내는 이야기가 뜻밖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역사를 읽는 즐거움과 슬픔이 여기에 있다.’
그의 따뜻한 책에 밑줄을 긋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숨을 지으면서 입추와 말복의 무더위를 잠시 잊었다. 이 책의 어떤 매력이 나를 끌어당겼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고 김인숙을 만났다. 그가 중국에 간 이유는 ‘그냥’이었다. 2002년에 가서 2년을 있었고, 돌아와 1년 반을 한국에서 머물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1년3개월 정도 있었다. 철새 기러기를 닮았다. 때가 되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가 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고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거죠. 그때 여러 가지로 어려워서 순전히 나를 위해 그냥 잠시 다녀오면 좋겠다 싶은 거지요. 난 행복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좀 힘들었지요.”
여러 가지로 어려울 때, 사람마다 취하는 포즈가 다르다. 난 힘들면 아무 데도 못 간다. 힘들 때 어딜 가면 더 힘들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상책이다. 그 힘든 생각이 너무 무거워 내려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려놓으려 해도 힘이 필요한데 겨우 버티는 수준이다. 더 두려운 건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기러기처럼 훨훨 떠났다.
“중국 다롄(大連)에 가서 지낸 최초의 1년은 내 생에 제일 행복한 시기 중 한 시절입니다. 생이 저에게 준 휴가 같았어요. 난생 처음인 곳에 가서 새로운 것도 보고 신기한 경험도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지만 1년을 넘기고 2년이 되어 가면 그 신선함이 진부함으로 바뀌고, 결국 같은 일상이 되지요. 그럼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저는 새로 도착한 곳에서 2년을 못 넘겨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어 지루해져버리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황석영 선생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혹시 습관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건 아닐까.
“아니에요. 그렇게 자주 나가진 않아요. 1993년에 호주로 가서 1년 반 정도 있었어요. 그땐 가족문제 때문에 아주 힘겨웠던 시절이었지요.”
남편과 헤어질 무렵이다. 그는 이혼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거쳤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가 보기에 전형적인 서울사람이다. 그간 작가들로부터 시골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재미를 본 나는 툭, 하니 걸렸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이 추억이 많은 것은 고향이 서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추억이 없다. 추억이 있던 자리는 모두 고층건물이 올라갔다. 그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아버지의 부재
추억이란 흙이 있는 자리에 자라는 풀이거나 꽃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흙에 대해서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쓸 게 없겠네, 싶은 마음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는 활짝 웃었다.
“유년시절 사진을 보면, 모르는 얼굴들과 찍은 사진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하숙집을 했는데, 그때 하숙을 하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지요.”
“35세가 넘어서야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인이 의료사고인 걸 알았어요. 주사를 잘못 맞아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의 비명소리가 매우 강렬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아버지가 멋쟁이여서 어머니 속이 상하셨겠지요. 하지만 큰오빠는 아버지를 아주 멋있는 분으로 추억하고 있었어요. 한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각인되어 있지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상처도 없어요. 저에게 아버진 처음부터 없었던 거죠.”
혹시 내가 아버지를 어린 시절에 잃었다는 말을 듣고 눈빛이 흔들렸을까,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만 말했다. 그가 기억을 하든 안 하든, 상처가 있든 없든, 아버지의 부재는 그녀에게 문학을 할 자리를 내면에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빈 공간은 어린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았고, 그것은 글쓰기로 이어진다.
그는 고교 3학년 시절 만해백일장에 나가 시 부문에서 장원을 했다. 학생시절, 문학보다는 공부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 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깡마른 여자아이, 화장을 짙게 하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 발랄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생이 되었다.
작가 김인숙의 등단과정은 어린 푸이가 울면서 황제가 되기 위해 궁으로 끌려가는 모습과 닮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관문이 그의 등단 모습이다. 당시 대학 1학년, 그것도 방송국 피디를 꿈꾸는 소녀가 자신이 원하는 학교의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던 중에 덜컥 일어난 일이다.
신춘문예 당선 통지가 오던 날, 그는 친구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려 길거리를 쏘다니다가 집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모친께서 불안한 표정으로 “너 뭐 잘못한 거 있느냐?”라고 물었다. 문단이나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어머니는 신문사에서 자신의 딸을 찾으니 마치 안기부에서 학생운동 하는 아이 찾는 것처럼 들린 탓일까. 그는 그렇게 당선되었다.
가난하고 거친 동네
1984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이제 문단 나이 25년이 된 중견작가다. 그녀는 자신의 등단 작품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제가 요즘 심사위원을 하곤 해요. 만약에 말이지요. 제가 그때 심사했다면 그 작품은 처음 서너 장 읽어보고 바로 옆으로 제쳐놓았을 겁니다. 지금 보면 문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작품이에요. 그런 물건을 가능성만 보고 뽑아준 선생님들께 감사하지요. 심사를 해봐서 아는데 신인의 작품을 오로지 가능성만 보고 뽑는다는 거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그녀는 등단을 하고 나서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명하다. 문학보다는 문학 외적인 데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대단했다. 지금 와서 천천히 읽어보니 ‘상실의 시대’는 여성지용이었다. 여성지용이라는 말은 통속적이라는 말이다.
[img2]여성지는 통속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잡지다. 그들에게 일류대 신방과 예쁜 여대생이 젊은이들의 성과 사랑을 감정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문장으로 쓴 작품은 좋은 기삿거리가 된다. 그런데 여성지 기자들이 앞 다퉈 그에게 왔다가 인터뷰를 하고나면 모두들 재미없어 했다. 뭔가 짜릿한 것이 있나 싶어 왔다가 확인해보니 그냥 심심한 한 여대생이 있었다.
등단을 하고나서도 마찬가지다. 문단은 가난하고 거친 동네다. 아름다운 낙원이 아니다. 새 작가가 나오면 호랑이가 비탈에 새끼를 굴리듯, 독수리가 절벽에서 새끼를 던져버리듯, 그냥 문학이라는 황무지 들판에 풀어놓는다. 살 놈만 알아서 사는 것이다. 어린 여대생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견디고 글을 쓰면서 살아내야 하는 고독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그때 누군가 길을 잘 잡아주었으면 그 어려움을 조금은 수월하게 견디고 빠져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등단했기에 질투 아닌 질투도 받았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인 고 정광용 선생은 이런 말을 전화로 남겼다.
“통속작가가 될 소지가 큰데, 그런 우려를 무릅쓰고 뽑아줬소. 경계하시오.”
지금 막 등단한 작가에게 선배 작가의 이러한 조언은 차라리 따뜻한 것이었다.
“작품을 뽑아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다가 들은 말이지요. 그래요, 선생님들의 안목이 옳았어요. 과연 저는 통속소설을 그 다음에 썼고, 꽤 팔았어요.”
통속소설이란 문학적인 성취가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위험한 말이다. 소설은 원래 통속적이야 한다. 통속이란 무엇인가? 속세와 통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전적 의미로는 ‘일반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 전문적이 아니고 일반으로 알기 쉬운 일’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통속이다. 소설처럼 속세와 통해야 하는 문학 장르는 흔치 않다. 소설은 대중을 상대로 한 통속의 전형이다.
그가 말한 통속소설은 ‘핏줄’을 말한다. 내가 듣기에 그는 통속의 기준을 자신의 진정성에 두고 있다. 자신이 바라볼 때 진정성이 떨어지는 작품을 통속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대학 시절을 보낸 시대의 진정성은 학생운동이었다. 그는 통속소설의 악령에서 벗어난 소설을 발표한다.
내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다. 내가 대학 졸업 무렵에 그는 대학 1학년으로 신춘문예 당선을 했고, 그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보면서 ‘이것 봐라 문단에 물건 하나 나왔네’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김인숙이라는 이름은 내 마음에 학생운동 소설을 쓰는 작가로 남았다.
통속소설과 진정성
그는 자신을 담금질하는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작품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하고, 같이 놀고 어울리는 친구가 그에게는 적다. 등단 작품에 대한 공포감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상처였다. 등단 작품은 그에게 여러 가지로 압력을 넣었다. ‘넌 앞으로 이런 작품 쓰지 말라’ ‘너의 작품은 대학 문화를 왜곡한 일이야’라는 환청도 그에게 들린다. 때가 1980년대였다.
대학 졸업 무렵에야 같은 학교를 다니던 작가 심산을 통해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알게 되고, 김정환 김남일 같은 좋은 오라버니도 만난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는 저에게는 전환기적인 작품이죠. 학생운동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 그동안 나라는 작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하게 되었고, 그 소설을 쓴 거죠. 그러한 관문을 거치고 나서 등단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저는 등단 작인 ‘상실의 시대’를 저의 작품집에 실었어요. 그 작품집의 ‘작가의 말’을 보면 그때 저의 심경이 잘 보여요.”
그의 두 번째 창작집 ‘칼날과 사랑’은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다. 등단작을 10년이 지나서야 작품집에 수록하는 심경을 밝힌 작가 후기를 조금 읽어보자.
‘이제 와서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 화해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화해라는 말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난 늘 그랬던 것 같다. 5년 전에는 10년 전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1년 전에는 5년 전의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래서 늘 어딘가 모르게 내 인생 전부가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사실은 그래서 1년 뒤의 내가 또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도 있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가졌던 내 인생의 한 부분도 놓치지 말고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이후 내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는, 나부터가 관심사이다. 어쨌든, 정말 어쨌든, 좋은 글을 쓰고 싶다.’
1993년에 낸 두 번째 창작집을 보면 그녀는 이미 소설집으로 ‘함께 걷는 길’, 장편으로 ‘핏줄’ ‘불꽃’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긴 밤, 짧게 다가오는 아침’ 등이 있다. 10년 사이 4편의 장편을 쓰고 한 권의 창작집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녀에게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나는 ‘당신은 왜 글을 쓰냐’고 ‘좋은 대학 신방과에 다녔으면, 방송국에서 피디를 하면서 살지 왜 글을 썼느냐’고 물었다.
“그래요, 글 쓰는 게 너무나 싫었어요. 당시 나는 학생운동에 경도되어 있었지만, 솔직히 공장에 들어가서 행동하진 못했어요. 저의 캐릭터상 그 시대에 대한 보상심리랄까 뭐 그런 마음으로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 저의 진정성이었지요.
작가는 늘 현재를 쓰는 존재
혹시 제가 글 쓰는 게 싫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고 방송국의 피디가 되었다면 아마도 회사를 그만두거나 휴직을 하고 절 같은 데 가서 글 쓴다고 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작품을 응모하고 당선 소식을 기다리는 그런 생활을 했을 겁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 김인숙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여자다. 서울여자 특유의 깍쟁이 기질은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혼자 몰두하는 일에 천재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다만 연애는 혼자 할 수 없기에 외롭고 힘겹지만, 그것 역시 잘 견디는 눈치다. 이런 말도 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 때문에 글 쓰는 행위는 저의 생존방식입니다. 안 쓰면 굶는 거죠. 그래서 항상 치열할 수밖에 없어요.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먹고사는 문제이니까요. 그것처럼 절박한 일이 없지요. 그리고 등단하고 20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난 늘 늙은 작가예요. 작가로서 25년을 살았으니 그런 거죠.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노인이 되어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동안 잘 써왔고, 여기까지 잘 왔다. 지난 25년간 잘 해왔다. 문학적으로도 변방에서 헤맨 적이 없으니 선생님이 염려한 통속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집이 많이 나가지 않아도 견뎌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고맙기도 해요.”
그는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단 젊은 작가들이 좋은 소설을 발표하면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자신은 특별히 작품을 찾아 읽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게 김인숙이었다. 그는 기억을 잘 하지 못했다. 천부적인 망각기질을 타고난 행복한 여인이었다.
“저는 제 책의 줄거리, 제목도 잊어버려요. 그렇게 살아요. 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살아가는 거지요. 안 잊으면 살 수 없을 거예요.”
이 대답에 개인적인 상처에 대한 어떤 함의가 있다. 하지만 짐작하지 말자. 그녀는 바로 이어 또박또박 말했다.
“작가는 늘 현재를 쓰는 존재입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저런 말을 자꾸 시키니까 대답하느라고 힘든 모습을 보였다. 잠시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일산의 익숙한 풍경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데 낯설었다. 그 낯설음이 나를 견디게 할지도 모른다. 항상 익숙하다면 재미없고, 재미없다면 금세 늙어버릴 것이다.
다시 ‘제국의 뒷길을 걷다’를 떠올리면서 푸이의 일생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제국의 뒷길을 걷다’를 쓰고 나서 다시 봤는데, 좋은 영화는 아니더군요. 푸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졸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img3]나는 그가 그 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해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나에게 각인된 몇 장면이 있는데 그가 그런 생각의 꼬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예를 들어 보좌 뒤에 숨겨놓은 귀뚜라미 같은 것이다. 황제 시절 귀뚜라미를 보좌 뒤에 숨겨놓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되어 그 자리를 관광객처럼 찾아 보좌 뒤를 살펴보니 그 시절 귀뚜라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영화적인 상상력이 환하게 빛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몰두형 인간
그가 푸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에 베이징인들의 모임 블로그에 베이징 이야기를 몇 편 올린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매체에서 연재를 하자고 했지만, 연재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에 거절하고 전작으로 슬슬 썼어요.”
그 넓고 깊은 시간의 강이 흐르는 베이징에서 중국의 비극적인 황제 푸이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그는 중국에서 방송된 드라마를 이야기했다. ‘마지막 황제’ 시리즈다. 거기서 가슴이 무너지는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정말 예쁜 여자였던 푸이의 부인 완롱, 황후인 그녀가 바람이 나서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장면이었지요. 푸이가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가 옆에 있는 환관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내가 아직도 황제냐?’ 그 대사를 듣는 순간, 뭐랄까 인간의 비애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고 심장이 박동치더군요. 충격적이었어요.”
언젠가 저 사람 푸이를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푸이의 자서전인 ‘내 인생의 전반부’를 다운받아서(상당한 분량의 책이라고 한다) 중국어로 읽었다.
그는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한번 빠지면 몰두하는 인간형이다.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시도 때도 없이 중국어 공부만 했다. 그때 몰두해 공부한 실력으로 중국어 책은 사전 없이 자유롭게 읽는다. 그의 책에 인용된 ‘내 인생의 전반부’는 직접 번역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변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금성에서 쫓겨나서도 평생을 황제로 살았을 겁니다.”
황제의 그늘
푸이를 통해 김인숙은 황제와 인간을 동시에 보았다. 자신의 자리가 없어 평생을 서성거리야 했던 인간, 아니 황제도 고독했지만 그의 곁에 있었던 시종의 삶은 더욱 더 한탄을 자아낸다. 푸이의 시중을 들었던 시종은 중국군에 의해 사상개조를 받으면서 한평생을 보낸다. 그렇게 세월을 허송하고 감옥에서 나와 보니 팔순의 나이가 되었다. 그 시종이 구술을 해서 쓴 책 역시 어떤 소설보다도 지독했다. 황제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평생을 감금당한 그의 인생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중에 푸이가 그를 만나러 갔지만,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태양과도 같았던 황제의 그늘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자신의 하늘이었던 황제를 보지 않은 것일까. 한 인간에 대한 마음을 알 길은 전혀 없다. 그저 슬플 뿐이다.
제국의 뒷길을 걸으면서 그는 북경성, 자금성, 황성과 같은 궁전과 황제가 태어난 곳 스차하이, 서태후의 이화원과 명십삼릉, 청 황릉까지 천천히 걷는다. 그곳이 중국의 유명 관광지이거나 혹은 뒷골목일지라도 거기에는 김인숙에게만 보이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황제는 큰 그늘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사람은 황후 완롱이다. 그의 최후는 참혹했다. 그의 인생 후반부에 대한 김인숙의 글을 천천히 읽는다.
‘완롱은 이미 절망적인 상태의 아편 중독자였다. 그녀는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했고, 씻지도 않았고, 아무 데나 똥오줌을 묻히는 상태였다. 대부분의 시간 정신이 혼미하여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그의 아비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욕설뿐이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아비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한 최초의 단추였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한 노여움과 분노였을 것이다. 자신을 황후로 만든 아버지… 그것은 왜 나를 낳으셨어요.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부정이었다.’
- ‘제국의 뒷길을 걷다’ 중에서
그의 아버지의 부재는 완롱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겹쳐진다. 그는 아버지를 모르기에 완롱과 같은 여자의 마음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근대화는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다. 고종은 비록 마지막 왕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마지막 왕으로 보인다. 그 뒤의 왕은 만주국의 푸이나 다름없다. 일본과 중국의 그림자가 조선의 작은 궁궐에도 드리워진다.
‘김인숙 소설은 80년대와 90년대(이러한 도식적 나눔이 허용된다면)를 각각의 시대성 속에서 살아낸 많지 않은 경우에 속한다. 단순히 소설적 연대기의 문제가 아니라, 두 시대성 사이의 단절과 흐름, 이접(離接)이 김인숙의 소설언어에 안팎으로 새겨져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안팎의 새겨짐, 혹은 이접의 연결고리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먼길’(1995)을 경계로 김인숙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주제화되는 ‘상실감의 내면화’ 양상이다.
(중략)
작가에게 상실감 혹은 상처의 근원을 자기 속에서 대상화하는 과정은 ‘온몸’의 지속적 투기를 통해 미적 거리를 조금씩 얻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적 거리’란,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착되면서도, 상상력에 의한 서사의 변주를 가능케 하며, 타자와의 열림을 소설 속에 들이는 기본적 규율이다.’
- 정흥수 ‘소설의 고독’ 중에서
‘문학동네’에서 나온 그의 창작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 대한 평론인데, 그의 처음과 지금을 잘 말해주고 있다.
25년간 소설을 쓰면서 그는 ‘하나 되는 날’로 1987년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먼 길’로 1995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개교기념일’로 2000년 현대문학상을, ‘바다와 나비’로 2003년 이상문학상을, ‘감옥의 뜰’로 2005년 이수문학상을 받았다.
문단의 이러한 상찬은 그동안 외롭고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온 그에게 빛이 떨어진 자리다. 그 빛나는 자리에서 그는 머물지 않았다. 뒤로하고 또 길을 떠난다.
단절과 흐름, 이접
그의 곁에는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재능과 인간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화를 걸어 밥을 사주고 싶은 동생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연애하고픈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언젠가 평론가 김화영 선생에게서 들은 말을 전해주었다.
“내가 어제 음악회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은 공연이었다. 그때 생각한 건데, 사람에게 엑스터시를 주는 건 문학과 음악이다. 책을 천천히 읽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엑스터시가 있다. 마치 아름다운 음률이 순간적으로 황홀하게 하듯 말이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나고 작업실로 돌아와 그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이건 위험해, 이걸로 문신을 했다간, 자넨 평생 바다 위에 있어야 할 거야. 자네 같은 사람이 이걸로 문신을 했었지. 얼마 후에 바다에 나가봤더니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완전히 소금에 절여져서 바다에 떠 있더군. 몸통이 없는데도, 팔과 다리는 계속 날갯짓을 해대고 있었어. 내가 새겨준 문신도 사라져버렸더군, 그냥 자리만 푹 파여 있는데, 날개가 찢어진 자리가 선명해. 너무 오래 난 거지. 나비한테 바다는 너무 넓단 말이야.’
- 소설 ‘바다와 나비’ 중에서
‘나의 생은 아직도 그 아침의 등굣길 같다. 닿아야 하나, 닿을 생각이 없는, 그러나 등을 돌릴 수도 없는…문은 의도적으로, 아직도 너무 멀다.’
- 소설 ‘봉지’ 중에서 작가의 말.
내 서재에 있는 그의 책만도 10권이 넘는다. 다 쌓아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래된 책들도 있고, 방금 나온 책도 있다. 그 책들이 마치 그가 걸어온 ‘좁은 길’처럼 보였다.
그에게 문학은 푸이의 ‘자금성’이 아니라 베이징의 뒷길이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 다롄에 있을 때에도 좋았던 이유가 1시간 반 정도 자유롭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롄은 지금도 개발 중이어서, 부자들의 호화 빌라촌과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판잣집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리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이 길을 걸으면서 그는 진정 행복했다.
중국에서 생활한 덕에 중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법도 배웠다.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조 이야기를 하면 좋아해요. 5000년 역사니까 정말 징글징글하게 긴 역사가 있는 나라이지요.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왕조 이야기를 하는 게 친해지는 방법이 되기도 해요. 중국의 역사가 너무 길어서 이번 책에서는 명나라와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로 시대를 딱 끊어서 썼어요. 그 위로 올라가면 너무 멀고 커요.”
베이징의 뒷길
이제 시간이 지나면 이 중국의 이야기도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가 최근에야 보게 된 세계의 명작 ‘모래의 여자’ 이야기를 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모래의 여자’를 다시 꺼내 슥 넘겨 보았다.
[img4]소설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이 한 페이지에 적혀 있다. 단 한 줄의 문장과 여백,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낌이 고스란히 이 한 문장에 들어 있었다. 이 한 줄은 시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역시 아주 강렬하게 읽었다고 했다.
김인숙은 이 작품을 나이 들어 읽어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그가 이제 작품을 쓰는 일도 나이가 들어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등단했다는 짐은 이제 완전히 껍질이 되어버렸다. 가을 날, 나비가 날아오른 자리에 있는 고치와 같은 짐들을 하나 둘, 오래전에 이미 벗어버렸다.
김인숙에게는 여가 시간을 보내는 잡기가 없다. 선후배들과 어울리는 술자리 정도다. 하지만 그는 퍼즐놀이 같은 집중력을 요하는 놀이를 잘한다. 그가 그런 놀이를 즐겨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집중하려면 정신이 텅 비어야 해요. 고민이고 뭐고 없는 거지요. 몸으로 움직이는 육체적인 활동은 좋아하지 않지만 뭘 하고 싶을 때는 제일 먼저 어딘가로 떠나지요. 저는 뭐 하나 하기 시작하면 죽어라고 그것만 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요. 뭘 해도 첫 단계랄까 한 시기랄까 좌우간 거기까지만 해요. 수영을 해도 처음엔 제가 제일 잘해요. 중국어 공부도 그렇고.”
그래서 원고 마감이 있거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새로운 일은 시작하지 않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즐거운 놀이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좋은 연애 꿈꾸다
종교가 있나 싶었다. 그는 심리적 가톨릭 신자라고 했다. 신자로서 생활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언니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준다고 했다. 거기서 위안을 얻는 모습이었다. 신앙은, 종교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며 자신도 힘겨울 때 성당을 찾곤 한다고 했다. 조금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맞아요. 왜 서울사람이다 할 때 연상되는 그런 이기적인 모습이 있잖아요. 빚지는 거 싫어하고 빚을 내지도 않아요. 이렇게 적당한 거리에 앉아 이야기할 때의 저의 모습과 깊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많이 달라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많은 걸 바라는 여자죠.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기적이 되는 건, 사랑의 속성이 아닐까. 나 역시 심한 편인데, 그게 질투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의 이기적인 성향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천생 작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작가라는 생각에 쉼표를 찍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산을 좋아한다 했다. 그 산은 산책하기 좋고, 산소리, 물소리, 고즈넉한 절이 있는, 넉넉한 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땐 바다를 좋아했는데, 살수록 산이 좋아진다고 했다. 심심한 걸 잘 견디기 때문이다. 심심한 걸 잘 견딘다면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다. 단 풍경이 좋아야 한다. 풍경만 좋다면 심심한 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리산은 누가 뭐래도 풍경이 좋은 곳이다.
자신은 심심한 걸 잘 견딘다고 말하지만, 그는 좋은 연애를 꿈꾸고 있다. 결혼에 대한 생각보다는 좋은 사람이 가까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좋은 사람이 가까이 살면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서로 보고 싶을 때 보는 거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영화 보고 싶을 때 같이 보고, 같이 자고 싶을 때 자고…. 그런 멋진 생각을 하고 있는 그에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 결혼을 해서 아주 잘 먹고 행복하게 살다간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고로의 책 ‘D에게 보내는 편지’를 권해주었다. 그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깃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했다면서 힘들어했다. 저녁을 같이하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점심, 저녁 약속이 정해져 있었다. 좀 아쉬웠다.
그를 만난 지 며칠이 지나 난 또 인왕산을 올랐다. 다시 인왕산 정상에서 산바람을 맞으니 시원했다. 이 맛에 산에 오른다 싶었다. 잠깐이지만, 그건 깨우침이었고, 열반이었고, 부활이었다.
그날은 내려오는 길에 오리 같은 기러기가 있는 집에 가지 않았다. 숲 속에 지붕만 보이는 그 집을 지나치면서 나는 보았다. 기러기 한 마리가 땡볕에서 날아오른 모습을. 날아가면서 기러기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부셔 저것이 무엇인가 싶었다. 그때 하늘로 날아오른 기러기가 내 머리 위를 지나치면서 깃털 하나를 떨궜다. 새털구름처럼 기러기는 날았다.
아니 새털구름이 기러기처럼 날았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그 기러기 깃털로 만든 펜이 하나 있다. 이 깃털 펜을 잡으면 하늘이 보인다. 새가 날던 그 하늘이 손으로 전해진다. 하늘을 만진다는 건 깃털을 만지는 것이다. 김인숙은 멀리 날아가는 새와 같은 작가다. 그를 가둘 수 있는 건 세상에 없다. 그의 깃털인 책을 다시 펼쳤다. 일요일 오후, 나는 지치고 힘들다. 그의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낮잠을 청했다. 기러기 날개를 달고 북극으로 가고 싶다. 세월아 어서 겨울로 가렴.
[신동아] 2008년 11월호
나는 지금도 인숙이 소설이 정말 훌륭하다(!)고 확신한다
원재훈 시인의 글은...좋지만...잘못된 구석 하나!
인숙이는 대학 졸업 즈음에 나를 만난 게 아니고
대학 입학하자마자 나를 만났다
...그래서 20대를 아주 피곤(?)하게 보내야만 했다...ㅋㅋㅋ
이 글을 읽으니까...인숙이가 되게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