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문학 올레길이 있다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김성연 글, 홍상현 사진/터치아트
명로진/인디라이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홍어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제일 맛있는 한우를 먹을 수 있는곳은? 제일 맛있는 제주 흑돼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서울이다. 홍어회와 한우가 특산품인 고장에 미안하지만, 흑돼지의 고향 제주도에 죄송하지만 최상품은 서울로 공수된다. 서울에 돈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이탈리아 식당이 이탈리아에 있지 않고 뉴욕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서울은 먹을거리의 도시인가? 아니, 도대체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디자인의 도시? 청계천이 있는 도시? 금융의 도시? 패션의 도시? 아니다. 서울은 문학의 도시다. 최소한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의 저자들에겐 그렇다. ‘사람과 재물이 모이는 곳에 이야기도 싹트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울의 열 두 곳을 문학 올레길로 소개하고 있다. 명동, 남산, 서울역, 정동길, 광화문, 종로, 북촌길, 평창동, 대학로, 성북동, 사직동, 신촌이 서울의 대표적인 문학동네다.
광화문을 예로 들어 보자. 통의동에 미당 서정주가 머물던 보안여관이 있다. “그해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려내게 되었다.....” 서정주 시인의 말이다. 이곳을 지나 통의동 백송을 뒤로하고 우리은행 골목으로 30미터를 올라가면 <오감도>의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터가 나온다. 집터만 있고 기념관은 없다. 기념관 건립 사업이 진행중이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다른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라는 시구로 우리를 경악케 했던 이상이 살았던 집터를 왜 아직도 방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라면 벌써 기념관 세웠겠다. 이곳을 지나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 가옥이 있다. 노천명 가옥을 나와 골목을 거슬러 올라가면 누상동 9번지에 이른다. 이곳은 윤동주가 하숙하던 곳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다시 길을 내려와 효자동 종점에 이르면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하숙하던 곳이다.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에서/ 살았다. 종점 근처의 쓸쓸한/ 하숙집.....” 보안여관에서 효자동까지 2km 남짓된다. 걸어가면 30분이면 충분하다. 이쯤 되면 서울시에서 ‘우리 시인길’ 이란 걸 지정할만도 하다. 왜 지정안하는 걸까? 서울시 문화국은 뭐하고 있는 거지?
나는 상상해 본다. 시를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어느 날 황혼 무렵, 보안 여관 앞에 모인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낭송한다. 자리를 옮겨 이상 가옥터에서 <날개>의 한 구절을 읊는다. 노천명의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를 거쳐 윤동주의 <서시>를 통과해 박목월의 <나그네>로 마무리한다. 걸으면서 시를 음미하고, 시인의 집 앞에서 생을 숙고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문학을 나눈다. 아아, 이쯤되면 효자동 어느 주점에 들어가 고무된 시심을 달래야 하리라.
이 책은 산책하는 사람들의 벗이다. 광화문의 예처럼, 서울의 문학 동네에 연관된 시인, 소설가, 수필가의 이야기를 펼친다. 책을 들고 당장 명동에 나가면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명동예술극장으로 이어지는 2.5km- 한 시간짜리 문학 산책로를 거닐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서울은 거대한 문학 소재지다. 웨스틴 조선호텔은 전광용의 <꺼삐딴 리>에, 남대문은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 서울시 의회 건물(일제시대 부민관)은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정독도서관은 최인호의 <머저리 클럽>에 배경을 제공한다. 하다 못해 파고다 극장에도 문학의 자취가 숨어 있다.
‘기형도는 이곳 파고다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보다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고, 시인의 나이 29세였다. 시인이 죽은 지 두 달 후에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고, 이 시집은 90년대 이후 문학을 지망한 청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집의 하나가 되었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작메모’에서 기형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시인들, 작가들이 고통을 감수하며 만들어준 거리의 상상력 덕분에 우리의 선택은 깊고 넓어진다. 그들의 고통에 애도를 보내며 우리의 길을 계속 가야할 것이다’(P 175)
정동 골목의 이화여고엔 손탁호텔 터가 있다. 독일 여성 앙트와네트 손탁에 의해 운영된 이 호텔은 1903년에 완공되었다. 고종은 이 호텔 1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즐겼다. 러일종군기자로 왔던 마크 트웨인도 이곳에 묵었고, 안중근에 의해 암살된 이등박문도 1년 동안 숙박했다 한다. 이런 곳에 작은 부티크 호텔을 세우면 어떨까? 커피숍 이름은 ‘고종 가배’ 디럭스 룸은 ‘마크 트웨인’ 화장실은 ‘이등박문’......
서울에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서울을 참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 유래가 1928년에 경성 가정 법원이 덕수궁 옆 서울 시청 서소문 별관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가정 법원에서 이혼하고 나오는 커플들이 얼굴을 붉히며 이곳에서 헤어졌단다. 물론 가정법원은 서초동으로 이전한지 오래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거리에 입혀진 이야기를 즐긴다.
서울의 거리거리엔 이야기가 숨어있다. 이야기는 거리를 풍요롭게 한다. 이야기 없는 거리는 곧 잊혀진다. 거리가 있어서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있어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이 선정한 열 두 곳 중에 강남은 한 곳도 없다. 강남이야말로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무르익지 않았다는 말일까? 채만식, 박태원, 김소월, 이상부터 시작된 우리 문학의 준열한 흐름이 강남에 미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일까?
나는 강남이 빠진 이 목록을 보고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문학이 자본에 복수하는 듯해서. 몇 년 쯤 지나야 압구정과 강남역과 신사동이 얽힌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속편이 나오게 될까? 하긴 강남 사는 부자들이야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우린 문학 같은 거 없어도 잘 살거든? 책이야 나오거나 말거나 상관없거든?’ 아, 네....
[북모닝 CEO] 0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