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12-05 12:55:46 IP ADRESS: *.237.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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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빚

명로진/인디라이터

몇 해 전 인도 뉴델리에 갔을 때 일이다. 아침마다 공원에서 요가를 하는 구루를 만났다. 그는 맨발에 허름한 옷 하나만 걸친 모습이었지만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그때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에게 내 사정을 말하자, 그는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 친구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았다.
“아미르는 나와 20년을 넘게 사귀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하고 무능합니다. 저는 있는 힘껏 그를 도와줬습니다. 그가 내게 돈을 빌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그가 빌려간 돈은 벌써 10만 루피가 넘습니다. 그동안 제가 그에게 빚진 걸 독촉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번에 급한 일이 생겨 돈을 갚으라고 했는데, 모아 놓은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겁니다. 아미르는 정말, 저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구루는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언제나 행복한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자네의 아내에게 비밀이 없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어디서건 마음대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누구와 함께라도 편안히 술을 마실 수 있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아무에게나 눈치 보지 않고 자네의 고민을 털어놓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단 한 번도 외로워 한 적이 없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가끔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어질 때가 있는가?”
“네….”
“자네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누구에게나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아내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을 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을 때, 편안히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 가끔 외로워질 때, 그리고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어질 때, 자네는 누구를 찾아가는가?”
“아미르를 찾아갑니다.”
“자네 역시 아미르에게 빚 진 것이 있음을 알겠는가?”
그 사내는 조용히 일어나 돌아갔다.

구루는 내게 말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빚을 까맣게 잊고 산다.”고.

[좋은 생각]  2009년 12월호

profile

심산

2009.12.05 13:13
*.237.81.203
가슴을 뜨끔, 하게 만드는...참 좋은 글이다

조성은

2009.12.05 13:51
*.34.40.233
코끝이 시큰 ㅜ 명로진 선생님 다음에 꼭 수업 듣고 싶어요
profile

명로진

2009.12.05 16:17
*.192.225.223
아이고....심샘!
칭찬보다 따끔한 채찍을 주소서. ^^

김형기

2009.12.06 22:30
*.29.192.245
가끔 술 얻어먹다 보면 후배 녀석이 그럽니다. 진짜 형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그럼 바로 그럽니다. “육억 이천 팔백 오십 이만 삼천 원” 이라고. 그게 20년 동안 내가 너한테 쓴 술 값이라고, 그러니 조대이 샷다마우스 하시라고. 그러면 후배 녀석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냥 웃고 맙니다. 최근 들어 후배 녀석들과 술 마실 땐 거의 돈을 내 본적이 없어요. 돈은 원래 더 잘 버는 놈들이 내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 거 절대 신경 안 써요. 오히려 막 더 비싼 거 시켜먹자고 깐족거리는 편이지. 그럴 땐 겸양 안 떨고 고맙고 맛있게 잘 먹어 주는 게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사주는 사람 가오도 서고 돈 쓰는 재미도 있지요. ㅋ

사실, 전에는 후배들과 술 먹는 데 너 돈 내 돈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내가 선배여서이기 보다는 그땐 술 마시는 거 자체가 중요 했으니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무조건 내가 다 쐈죠. 가끔 ‘바둑이’ 라도 해서 한몫 챙기면 그 주일은 단란이다 룸방이다 아주 축제기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근데 요즘 들어 그렇게 막상 계속 얻어만 먹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구나.’ 후배들이랑 그렇게 허물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데도 얻어먹는 덴 그 어떤 불문율 같은 게 존재하더군요. 진짜 처음 알았습니다. 그건 바로 술이나 밥을 얻어먹을 땐 적어도 내 이야기보다 녀석들의 이야기를 훨씬 더 잘, 그리고 많이 들어줘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야 다음에 안 튕기고 더 잘 사주더라고요. 안 그럼 계약 파토에요. ㅋ

그런데 그게, 남 이야기 잘 들어 준다는 게 어디 쉽나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술 처먹고 막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 하고 있음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자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예전에 녀석들이 후배라서 당연히 내가 무조건 사주고 베풀고 있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 그런데 그게 절대 공짜가 아니었구나. 왜냐면 내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누구에게나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을 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을 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을 때, 편안히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 가끔 외로워질 때, 그리고 울고 싶어질 때면 언제나 녀석들을 찾아가 술을 마셨으니까요. 그리고 언제나 녀석들은 그런 내 이야기를 묵묵히 잘 들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고역이었겠습니까. 이 세상 남자로 태어났다면 기분 내면서 돈 쓰고 보스질 안 해 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살다 보니 그 역할이 지금은 바뀐 것뿐입니다. 그러니 녀석들은 돈을 내고 나는 기쁘게 잘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잘 들어 주면 됩니다. 내가 술 처먹고 더 많이 나불대는 반칙만 안한다면 녀석들은 기꺼이-돈을 버는 한- 나한테 돈을 쓸 겁니다. 그리고 녀석들도 그렇다고 돈이나 물질로 사람을 함부로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짓만 안한다면 그 불문율은 언제 까지 지켜질 겁니다. 안 그러면 바로 죽통을 날리고 쫑을 내버려야겠지요.
그래서 아까 이 글을 복사해 내일 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후배 녀석들에게 보냈습니다.

읽고 좆 잡고 반성 좀 해라! 알긋냐 이 새끼야! 돈 돈 그러지 말고 ㅋㅋㅋ
profile

심산

2009.12.07 13:10
*.241.46.65
형기는 로진에게 술 한 잔 사라...ㅋ

김형기

2009.12.07 16:30
*.29.192.2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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