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만나다
명로진/인디라이터
“내 별명은 돼지 입니다. 나는 공부는 잘 못하지만......” 당진에서 만난 복스러운 5학년 여자 아이는 자기를 소개 하는 종이 위에 여기까지 썼다. 나는 읽다 말고 아이들을 쳐다봤다. 순미는 좋은 점도 많을 거야. 공부는 잘 못하지만 친절하지? 아이들은 네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착해요, 공부는 잘 못하지만 잘 웃어요. 공부는 잘 못하지만 친구가 많아요. 순미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린다. 나는 순미를 안아 준다. 순미야, 네가 가진 장점이 이렇게 많단다. 선생님도 알고 친구들도 알잖니. 그런데 왜 울어? 순미는 훌쩍이며 말한다. 고마워서요.......
나는 요즘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글쓰기 특강’을 하고 있다. 대구, 충남 당진, 전남 순천, 서울, 경남 함양, 전북 익산-장수, 강원 춘천, 충북 청양, 경북 경주, 그리고 제주까지. 그동안 성인들을 상대로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단 하나다. 학력과 학벌이 글쓰기 실력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석사, 박사 학위를 따고도 이런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진정한 친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친구여야 진정한 친구입니다.”
‘참으로’와 ‘진정한’은 둘 중 하나만 쓰면 된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은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이야기다. 이 문장은 “진정한 친구는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합니다”나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정도로 고치면 된다.
진실에서 멀어질 수록 우리의 언어는 늘어난다. “사랑해” 한 마디면 될 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내 마음 다 바쳐서”라고 말한다. 진정의 내면은 단순이며 단순은 수식을 멀리한다.
어느 날, 우연히 초등학생들이 쓴 글을 보고 위와 같은 비문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것부터 좀 고쳐 주고 싶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들에게 부탁해 각 도 마다 한 두 학교씩 소개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피망 빼고 다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게임은 피파 온라인 게임을 좋아합니다.”
“내가 자주 하는 운동은 야구와 축구를 시간이 날 때 마다 합니다.”
음식과 게임과 운동이 살아서 숨쉰다. 좋아하는 음식이 음식을 좋아하고, 게임이 게임을 좋아하고, 운동이 축구를 한다...
“회만 먹냐? 음식이 살아서 피망 아닌 다른 음식을 좋아하게?” 몸을 비틀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는 아이도 웃고,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도 웃는다.
아이들을 만나서 글을 올바로 쓰도록 가르치는 게 전부는 아니다. 아이들을 보면 신이 난다. 내 어린 시절의 웃음이 그들의 입술 위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보면 아프다. 내 어린 시절의 간난이 그들의 피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글을 깨우치지 못한 4학년이 있다. 여전히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다니는 3학년이 있다. 여전히 코를 흘리는 5학년이 있다. 아이의 엄마는 바쁘고 아빠는 가난하며 동생은 보챈다. 그나마 부모가 함께 있으면 다행이다.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도 있다. 아빠는 무능하고 엄마는 도망갔다.
나는 일부러 아이들의 배경을 묻지 않는다. 글은 아이들의 거울이다. 글을 깔끔하고 세련되게 쓰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와 유복하게 사는 아이들이다. 글이 엉망인 아이들은 가정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이들 속사정을 다 알면 글을 바로 쓰는 법을 가르치는 일 따위는 초라해진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이 글을 제대로 써야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고 믿는다. 글을 잘 써야 대우 받는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글을 올바로 써야 내일도 밝을 거라고 다짐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부끄러워진다. 너는 훌륭한 어른이냐? 대우받는 어른이냐? 밝은 내일을 가진 어른이냐? 이런 자문에는 어린이들에게 배운 솔직한 자답이 어울린다. “아뇨! 전 글 잘 못써요.......”
[샘터] 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