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0-01-22 12:27:13 IP ADRESS: *.110.20.12

댓글

4

조회 수

3867

누군가에게 쓰러지고 싶다
박종호의 이탈리아 여행기 <황홀한 여행>

명로진(인디라이터)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것만큼 허망한 것이 있을까? 그냥 책을 읽으면 되는 것을. 여행한 자의 글을 읽는 것만큼 허황한 것이 있을까? 그냥 여행을 떠나면 되는 것을. 음악에 대해 쓴 문장을 뒤따라가는 것만큼 허탈한 것이 있을까? 그냥 음악을 들으면 되는 것을.

박종호의 이탈리아 여행기 <황홀한 여행>은 그런 책이다. 읽으면서 허망하고, 허황하고, 허탈했다. 이 여행기는 마약과도 같다. 도봉구 쌍문동의 우리 집에서 마포구 서교동의 내 사무실까지 오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책 속에 감춰진 코카인을 주입하며 뿅 갔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책의 70% 만 읽었다. 뒷부분은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책 속의 글이 기가 막혀 울다 웃었으며, 사진이 멋있어서 한숨을 토해냈고, 이야기가 극적이어서 정신을 놓았었다.(나는 내릴 역을 지나치기도 했다.) 도저히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마치 백합 같은 스무 살 아가씨와 밀월을 즐기다, 호박꽃 같은 마누라에게 걸리는 꼴이다. 책 속엔 태양이 있고, 로맨스가 넘치고, 오페라 무대가 등장한다. 피렌체의 꽃내음이 넘실대고, 베네치아의 물결이 흔들거리며, 라 스칼라의 노래 소리가 진동한다. 아아, 음악과 꽃과 와인으로 점철된 이 책을, 이탈리아라는 여인네의 속 살 깊숙한 곳을 보여주는 이 책을, 오가는 2호선 전철 안에서 읽는다는 것은..... 미칠 노릇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읽지 마라.

‘......이것이 베네치아의 곤돌라이다. 둘이서 타야한다. 둘이 타더라도 절대로 아무하고나 타서는 안 된다. 저녁 베네치아의 곤돌라에서는 그 누가 옆에 타더라도 그 품에 쓰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저녁에 곤돌라를 타면 곤돌리노는 어둡고 좁은 운하사이로 곤돌라를 몰고 들어간다.

작은 운하에는 파도가 없다. 달빛에 비치는 수면 위로 곤돌라는 마치 얼음판을 지치듯이 스르르 들어간다. 좁은 운하로 들어가는 곤돌라는 과거의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세상과 단절된 둘만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같이 탈 그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혼자 타야 한다. 옆 자리는 언젠가 베네치아에서 만날 진정한 주인을 위해 오랫동안이라도 비워놓은 채..... ’

지은이 박종호는 정신과 의사다. 또 클래식 음악계에서 유명한 오페라 평론가다. 음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클래식 음반 전문점 풍월당을 만들기도 했다. 더불어 대단한 여행광이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에 빠져있다. 15년 동안 스무 번이나 방문했다. 나는 세계 6 대륙을 모두 돌아봤으나, 이탈리아를 못 가 봤다. 박종호에 따르면,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은 셈이다. 왜? 이탈리아에 가 보질 않았으므로.

이 책은 이탈리아의 매력에 푹 빠진 여행가, 아니 정신과 의사, 아니 음악 평론가, 아니 사진작가(도대체 박종호씨 당신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가 이탈리아에 바치는 헌사다. 연애시다. 아리아다. 나는 이 책의 첫 장 베네치아 편 제 1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이탈리아에 가 보고 싶어서였다. 다음 순간,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이탈리아에 갈 수 없어서이다. 여행을 하려면, 박종호처럼 해야 한다.

‘가이드, 그런 것은 필요없다. 모든 것은 책 속에 있다. 말, 궁하면 통한다. 돈, 빚을 내서라도 가야 한다. 시간, 일만하다가 영원히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떠나라. 그러면 일을 바라보는 시야부터 달라질 것이다.’

얼마나 명쾌한가? 그렇다. 모든 여행의 달인들은 ‘지금 당장 떠날 것’을 요구한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오늘 바로 이 시각에 문을 박차고 나가라고 부추긴다. 무릇 모든 여행은 3m 앞에 놓인 문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한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문을 나가지 못해 우리 인생엔 한 조각 모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자잘함과 인생의 찌질함은 우리를 오늘도 내일도 좁은 문 안에 못 박아 놓는다. 그러니 <황홀한 여행>이나 읽을 수밖에.

박종호는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베로나, 밀라노, 볼로냐를 거쳐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훑는다. 그는 대도시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감동과 치유의 도시인 베로나, 산 위에 세워진 중세의 도시 시에나, 가르다 호수의 반도 시르미오네 같은 작은 도시에서 더 많은 매력을 찾아낸다.
음악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한 편의 음악 드라마로 만든다.

‘베르디는 최고의 음악가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산타 아가타를 방문했다. 그 중에는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도 있었다. 그녀는 베르디를 너무나 존경했으며, 아예 이 집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만년의 베르디는 스톨츠의 명랑함과 자상함에 큰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부인인) 스트레포니가 설 자리는 줄어갔다. 나중에 스톨츠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스트레포니에게 누군가 안타깝게 입을 열자, 그녀는 “나는 이제 그에게 여자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베로나에선 여름 바람이 서늘한 7,8월에, 피렌체에선 꽃 피는 5월에 음악 축제가 열린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종주국이다. 로시니, 베르디, 벨리니, 토스카니니, 마리아 칼라스 같은  음악가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탈리아는 유럽 문화의 근원지이다. 바이런, 괴테, 키츠, 샐리 같은 시인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본고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같은 인물들이 인류 지식사의 커다란 축을 받들었다. 이탈리아는 건축의 나라다. 팔라디오라는 대 천재가 홀로 만들다시피 한 도시 비첸차는 한 단면이다. 도시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두오모가 있고, 첨탑이 있고, 아레나가 있고, 광장이 있다. 이탈리아는......이탈리아다.

박종호의 이탈리아 도시 사랑은 가슴 벅차다. 그러나, 마치 바람둥이의 편력을 연상시킨다. 베네치아-첫 사랑 같은 도시, 베로나-가장 아름다운 도시, 밀라노-라 스칼라가 있어 잊을 수 없는 도시, 피렌체- 아르노 강 노을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도시, 토스카나- 가장 기억에 남는 나날을 준 곳.....뭐냐고? 김혜수- 글래머라 사랑했고, 김하늘- 낭창낭창해서 좋고, 김태희- 지적인데다 얼굴도 예뻐서 웰컴......열 여자 마다 않겠다는 건가?

이탈리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도시마다 저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박종호가 스무 번 넘게 이탈리아를 오가며 수많은 도시에서 하는 일은 뭔가? 음악 축제에도 가고, 성당도 방문하고, 관광지에도 들른다. 그러나 기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는 아름다운 음악과 대리석 건축, 거리를 활보하는 발랄한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환한 태양을 받으며 노상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한나절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이탈리아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그저 그것만으로 충만한 그 무엇이다. 맥주를 마셔도 그만, 와인을 마셔도 그만이다. 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음악을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박종호는 이탈리아에 있는 순간 행복하다. 나는 애인과 함께 있는 순간 행복하다. 나머지는 모두 필요없다.

교보 북모닝 CEO 100121

profile

심산

2010.01.22 12:50
*.110.20.12
이탈리아는 정말...이탈리아다!
이탈리아는 그 이외의 어느 지역 어느 국가와도 다르다...그야말로 이탈리아다!^^

박선희

2010.01.22 16:44
*.255.179.46
띠아모 이딸리아!****^L^****
profile

명로진

2010.01.23 12:25
*.192.162.211
올해 이탈리아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서영우

2010.02.09 23:45
*.223.58.24
이탈리아... 투스칸, 피렌체, 가고싶은 곳,
이탈리아... 노숙자도 알랭드롱이라는데...
이탈리아... 문을 나서야 겠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 일본은 원래 백제 땅 일컫는 말이었다 + 5 file 심산 2012-06-07 2911
70 사진작가 김영수(1946-2011) + 3 file 심산 2012-05-26 4822
69 와지트를 경영하는 음악평론가 강헌 + 6 file 심산 2012-03-15 7453
68 강북의 가로수길로 떠오르는 경리단길 + 2 file 심산 2012-03-15 6627
67 제대로 된 혁명 + 6 심산 2010-10-08 3534
66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 + 3 file 심산 2010-08-02 3384
65 저자초대석/[내 책 쓰는 글쓰기] 저자 명로진 + 3 file 심산 2010-04-12 4005
64 심산 장편소설 [하이힐을 신은 남자] + 20 file 심산 2010-03-12 4930
63 인연 + 4 심산 2010-03-09 3490
62 자출해 봤어요?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 4 심산 2010-01-29 4630
» 누군가에게 쓰러지고 싶다 + 4 file 심산 2010-01-22 3867
60 글쓰기 자원봉사자로 변신한 명로진 + 11 file 심산 2009-12-28 3939
59 [아이리스] 작가들 첫 언론 인터뷰 + 1 file 심산 2009-12-20 5024
58 아이들을 만나다 + 5 file 심산 2009-12-18 3099
57 김신애의 상담심리사 2급 기출문제해설집 + 4 file 심산 2009-12-15 7891
56 보이지 않는 빚 + 6 심산 2009-12-05 3142
55 아쌈 차차차? 아쌈 차차차! + 8 file 심산 2009-12-04 3842
54 한 쌍의 바퀴벌레 + 8 file 심산 2009-12-02 4402
53 결혼해서는 안되는 남자들 집중분석 + 5 file 심산 2009-11-17 7114
52 함께 춤을 추어요, 탈린 + 1 file 심산 2009-11-01 4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