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임선경/방송작가, 인디라이터
대학 시절, 어떤 모임에서 처음 그를 본 순간! 빠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남아있는 ‘다’ ‘까’ 로 끝나는 말투, 진지한 표정으로 건네는 농담, 그리고.... 정말로 알 수 없는 이유들.
회원들끼리 수호천사를 만들었다. (20대 초중반들이었는데도 그런 놀이를 했다.) 무작위로 뽑은 쪽지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의 수호천사가 되었지만 막상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볼 때마다 가슴만 떨렸다. 어느 날, 후배와 서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후배는 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실망한 채 그냥 돌아서는데 그가 보였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러본 것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토요일 오후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렇게 시작했다. ‘인연’ 이거나 ‘운명’ 일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왜 첫눈에 반했으며 왜 그의 천사가 됐으며 왜 성실했던 후배는 그 날 나를 바람맞혔는가 말이다. 문제는 그가 그 일련의 사건을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은 했으되 짝사랑이었다. 폭풍 같은 나날들이었다. 황홀과 비탄을 넘나드는 롤러코스터를 탄 날들이었다. 2년이 지나서야 그 열차에서 내리고보니 발이 땅에 붙지 않는 듯 얼떨떨했다.
내가 ‘인연’ 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통렬하게 비웃는다. “여보게, 오늘 밤 ARW357 이라는 번호판을 단 차를 보았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수백만 개의 번호판 중에서 바로 그 번호판을 단 차량을 볼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
그렇군. ‘인연’ 이나 ‘운명’ 으로 포장된 일이 알고 보면 그저 평범한 일이거나 사소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인연인 것이고 아니라면 또 아닌 것이다. 한 쪽은 인연이라고 믿고 다른 한 쪽은 우연이라고 여긴다면 그게 바로 불행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 이라는 말처럼 마음 편한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을 포기할 때, 관계를 끝낼 때 ‘인연이 아니었다’ 는 말만큼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말이 또 있을까? 반쪽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요,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요, 내가 살 이유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그와 내가 인연이 아니었을 뿐.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만나는 동안에 우여곡절이 많았고 결혼한 지금에도 풍파가 많지만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우리가 인연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서로가 편하다. 부부는 그래야 사는 것이다.
월간 [방송작가] 2010년 3월호
'부부는 그래야 사는 것이다....'
수긍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