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6-05 21:03:26 IP ADRESS: *.201.18.249

댓글

4

조회 수

2151



[img1]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위험한 여행

크리스토퍼 햄튼(Christopher Hampton, 1946-    )

 

남성작가인 리튼 스트래치가 여성화가인 도라 캐링턴을 만난 곳은 버지니아 울프나 E.M.포스터 등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 친목단체 블룸스베리 그룹. 그곳에서 캐링턴에게 첫눈에 반한 스트래치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는 자신을 분명한 동성애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느영화제 각본상과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햄튼의 감독 데뷔작 [캐링턴]은 이후 스트래치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이나 지속된 그들의 기이한 우정-사랑을 담담히 묘사한 작품이다. 그들은 심지어 같은 그룹 내의 동일한 남자와 각각 정사를 벌이면서도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캐링턴]에서 아름답고도 위험한 방식으로 탐구된 성적 정체성의 문제(더 나아가 한 인간의 정체성의 문제)는 크리스토퍼 햄튼이 오랜 세월 동안 매달려왔던 매혹적인 주제였다.

포르투갈 출신의 영국인 햄튼은 어린 시절 부모들을 따라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중인 방년 18세때 자신의 첫 번째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부터 일찌감치 극작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런던의 웨스트엔드 무대에 연극을 올린 최연소작가라는 기록을 세운 햄튼은 이후 최고의 명문극단인 로얄 코트의 전속작가로서 활동하면서 오리지널 희곡의 창작과 고전작품의 각색 양면에서 모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훗날 영화화된 [토탈 이클립스]나 몰리에르의 [돈 후앙],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등이 모두 이 당시의 작품들이다. 햄튼을 영국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만든 것은 [위험한 관계].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라클로가 1792년에 발표한 이 음울한 풍속소설은 현재까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여러번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왔는데 햄튼의 각색이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으로 꼽힌다. 웨스트엔드 무대에서만 무려 2,000회 이상 장기공연되었던 이 작품은 훗날 또다시 영화로도 만들어져 햄튼에게 오스카 수상의 영광을 안긴다.

[img2]

햄튼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헨릭 입센 원작의 [인형의 집]. 이후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를 거쳐 그레이엄 그린 원작의 스릴러 [비욘드 리미트]에 이르면서 햄튼은 ‘정체성의 혼란과 탐구’라는 자신의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타히티에서 막 돌아온 폴 고갱이 파리의 화가들과 부딪히면서 겪게되는 심리적 동요를 그린 작품이 [문 밖의 늑대]이고, 이혼 당한 중년남자가 자신은 좋은 아버지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애쓰지만 실상 그것은 기만적인 자기도취에 불과하다는 것을 담담히 보여준 작품이 [좋은 아버지]이다. [토탈 이클립스]는 널리 알려진대로 동성애자였던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느의 비극적인 로드무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인 만큼 그로 인해 망가져 가는 데이비드 듈리스의 모습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메리 라일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흥미로운 변주. [위험한 관계]의 스태프들과 캐스트들이 고스란히 재투입되어 만들어진 이 작품에는 지킬박사 집에 새로  온 하녀로 줄리아 로버츠가 등장한다.

최신작이자 두 번째 감독작품은 조셉 콘라드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비밀요원]. 이 영화에서 포르노숍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밥 호스킨스의 정체는 무려 삼중 스파이다.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에 휩싸인 그는 결국 남들을 속이다 못해 자기 자신을 기만하기에 이른다. 미스터리 스릴러와 격조 높은 하이 코미디를 결합시켜 실존적 차원의 질문을 던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크리스토퍼 햄튼을 따라 떠나는 정체성 탐구의 여행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의 뒤편에 위험한 실존적 질문을 비장해놓고 있다. 누구든 그 질문을 덥썩 물었다가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치명적이고 날카로운 미늘에 꼼짝없이 꿰이고 만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img3]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3년 패트릭 갈랜드의 [인형의 집](A Doll's House)
1979년 맥시밀리언 셸의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Geschichten Aus Dem Wieder Wald)
1983년 존 맥켄지의 [비욘드 리미트](Beyond the Limit)
1987년 헤닝 칼슨의 [문 밖의 늑대](The Wolf at the Door), 마이크 뉴웰의 [좋은 아버지](The Good Father)
1988년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sons)ⓥ★★
1995년 크리스토퍼 햄튼의 [캐링턴](Carrington)ⓥ           
          아네츠카 홀랜드의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
1996년 스티븐 프리어즈의 [메리 라일리](Mary Reilly)ⓥ, 크리스토퍼 햄튼의 [비밀요원](The Secret Agent)

ⓥ는 비디오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8월 1일

박한내

2006.06.09 16:57
*.204.83.95
저 예전에 씨네21 헐리우드 작가열전 코너 왕팬이었거든요^^ 그 코너때문에 한겨레
시나리오강좌를 신청했는지도ㅎㅎ
들어올 때마다 한명씩 꼭꼭 씹어볼랍니다^^
profile

심산

2006.06.09 19:17
*.254.86.77
한내, 네가 그렇게 말하고 내가 이렇게 답하려니...무슨 [장수무대] 왕팬들 같네...?^^

백소영

2006.06.22 23:17
*.44.147.104
우리 키애누가 나오는 위험한 관계를 쓰신 분이군요.. ㅎㅎㅎ
음.. 토탈 이클립스에서 도서관 씬 정말 좋았는데..
profile

심산

2006.06.26 15:50
*.254.86.77
얼마전 런던에 갔더니 이 작가가 쓴 신작연극이 무대에 올랐더라구...주연이 제레미 아이언스였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6 시나리오를 쓰며 함께 늙어가다/Frances Goodrich(1890-1984) & Albert Hackett(1900-1995) file 심산 2006-07-12 1925
25 하이테크 액션의 개척자/Steven de Souza(1948- ) file 심산 2006-07-12 1801
24 미국적 이상주의의 전도사/Robert Riskin(1897-1955) file 심산 2006-07-02 1751
23 할리우드를 이끌어갈 젊은 작가/Andrew Kevin Walker(1964- ) file 심산 2006-07-02 1944
22 동심을 어루만지는 여심/Melissa Mathison(1950- ) file 심산 2006-07-02 1736
21 뉴욕의 수다장이 아줌마/Nora Ephron(1941- ) file 심산 2006-06-28 2035
20 멋지게 늙어가는 할머니/Elaine May(1932- ) file 심산 2006-06-28 1833
19 불교에 귀의한 폭력영화 작가/Sterling Silliphant(1918-1996) file 심산 2006-06-28 1985
18 유명한 미지의 작가/David Koepp(1964- ) file 심산 2006-06-25 2187
17 "더 이상은 못 참아!"/Paddy Chayefski(1923-1981) file 심산 2006-06-25 1915
16 차이나타운에서 미션 임파서블까지/Robert Towne(1934- ) + 1 file 심산 2006-06-25 2307
15 조숙한 신동, 진중한 노인/Waldo Salt(1914-1987) file 심산 2006-06-25 2024
14 기품 있는 사계절의 사나이/Robert Bolt(1924-1995) + 1 file 심산 2006-06-25 2107
13 사랑을 일깨우는 코미디의 황제/Neil Simon(1927- ) file 심산 2006-06-24 2123
12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선 사내들/Carl Foreman(1914-1984) file 심산 2006-06-24 1918
11 하드보일드 필름누아르의 아버지/Raymond Chandler(1888-1959) file 심산 2006-06-24 2182
10 히피세대의 르네상스맨/Sam Sheppard(1943- ) file 심산 2006-06-24 2008
9 셰익스피어와의 농담 따먹기/Tom Stoppard(1937- ) file 심산 2006-06-24 2177
8 장르영화의 수정주의자/David Webb Peoples(1940- ) + 2 file 심산 2006-06-05 2046
»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위험한 여행/Christopher Hampton(1946- ) + 4 file 심산 2006-06-05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