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신동, 진중한 노인
왈도 솔트(Waldo Salt, 1914-1987)
눈치챈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없다](1999)에는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이 녹아들어 있다. 우선 스타일면에서 그것은 [언지프](1998)에 많이 기댄다. 패션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의 창작과정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비드라마적인 플롯과 불연속적인 편집을 배워왔다. 컨셉면에서는 단연 [미드나잇 카우보이]다. 욕망이 넘치는 대도시의 밤거리, 실패만을 거듭하는 가진 것 없는 청춘들, 그리고 약간의 동성애코드를 내장한 버디무비. 작가는 물론 감독과 제작자까지 이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던 까닭에 실제로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이 빼어난 고전을 다함께 복습(!)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위대한 영화는 시공을 뛰어넘는다. 무려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건만 지금 봐도 모던한 느낌이 여전한 [미드나잇 카우보이]가 바로 그렇다. 왜소한 체구에 다리까지 저는 비굴한 펨푸 리조, 몸뚱아리 하나만 믿고 남창이 되려 뉴욕으로 스며든 시골뜨기 청년 조 벅. 절름발이 리조가 꿈꾸던 ‘플로리다 판타지’와 커다란 트랜지스터를 들고 뉴욕의 밤거리를 쏘다니던 조 벅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거기에다 존 배리가 작곡한 그 애절한 하모니카 연주며 너무 경쾌해 오히려 슬픈 주제가 [모두들 이야기하네]까지 겹쳐들면…. 과연 작품상과 감독상이 아깝지 않다.
이 영화로 오스카를 수상한 왈도 솔트는 조숙한 신동이었다. 14살 때 스탠퍼드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아낸 그가 대학원 과정까지 끝내고 강단에 서기 시작한 것이 약관 20살 때.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그다지 신명이 나지 않았던지 솔트는 곧 대학을 떠나 MGM과 전속계약을 맺는다. 그의 크레딧이 내걸린 첫 작품은 [진부한 천사].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의 병사가 사랑에 빠져든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이다. [필라델피아 스토리]는 여러 모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상류사회의 결혼풍속도를 선정적인 저널리즘과 연관해 보여준 이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잠시 브로드웨이로 퇴각해 있던 캐서린 헵번이 할리우드로 금의환향했고, 왈도 솔트 역시 역량있는 신예작가로 인정받는다(이 작품은 1956년에 [상류사회]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전쟁 영화([윙클씨 전쟁에 가다])와 서부극([레이첼과 이방인])을 거쳐 프리츠 랑의 고전 [M]
그의 컴백작품은 [대장 불리바]. 16세기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배경으로 코사크족 사나이들의 전쟁과 사랑을 호방하게 다룬 작품인데 초등학교 시절 명보극장에서 입을 헤 벌리고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플라이트 프롬 아시야]는 일본에서 촬영한 미 공군들의 이야기. 율 브린너, 조지 차키리스, 리처드 해리스 등 당대의 스타들이 펼쳐보이는 스케일 큰 액션물이다.
그러나 흥행사로 이름을 날리던 왈도 솔트가 진정한 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것은 아무래도 50대 중반에 쓴 [미드나잇 카우보이]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장르 영화들을 넘나들던 그도 이제 화려한 방랑(?)을 멈추고 진지한 사회파 감독들과 함께 인간 내면의 상처들을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다. [사랑의 시련]에서는 부패한 사회 속에 내동댕이쳐진 한 순수한 영혼이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다뤘고, [부서진 세월]에서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추한 인간들의 일그러진 욕망들을 보여줬으며, [귀향]에서는 베트남전쟁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것의 고통스러운 치유과정을 담담히 들려준다.
조숙한 신동이 진중한 노인으로 늙어가는 일은 드물다. 솔트는 바로 그 드문 일을 해냈다. 선댄스영화제에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그가 평생 쌓아온 혁혁한 공로를 기려 ‘왈도 솔트 시나리오상’이라는 특별부문상이 있다.
[img3]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38년 H. C. 포터의 [진부한 천사](The Shopworn Angel)
1940년 조지 큐커의 [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
1944년 앨프리드 E. 그린의 [윙클씨 전쟁에 가다](Mr. Winkle Goes to War)
1948년 노먼 포스터의 [레이첼과 이방인](Rachel and the Stranger)
1951년 조셉 로지의 [M]
1962년 J. 리 톰슨의 [대장 불리바](Taras Bulba)ⓥ
1964년 마이클 앤더슨의 [플라이트 프롬 아시야](Flight from Ashiya)
1969년 존 슐레진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Midnight Cowboy)ⓥ★★
1973년 시드니 루멧의 [사랑의 시련](Serpico)ⓥ★
1975년 존 슐레진저의 [부서진 세월](The Day of the Locust)ⓥ
1978년 할 애슈비의 [귀향](Coming Home)★★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