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12 21:08:27 IP ADRESS: *.5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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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응시하는 불안한 눈동자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 1946- )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연출하는 감독은 많다. 그러나 감독으로 데뷔한 다음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시나리오를 써주는 작가는 드물다. 폴 슈레이더는 여지껏 모두 22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 중 절반은 자신이 직접 연출했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감독들에게 연출을 맡긴 희한한 경우에 속한다. [아메리칸 지골로](1979)나 [캣피플](1982)처럼 세계적인 흥행작을 만든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마틴 스코시즈의 시나리오작가’로 기억하고 있는 현실을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하다. 작가로서는 더 할 수 없는 영예이겠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할 것 같지 않다.

미시건의 그랜드 래피드에서 태어난 그는 대단히 엄격한 캘빈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18살 때였다(!)고 하니 엄격함이 지나쳐 거의 수도승처럼 자라났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지나치게 억누름을 받은 아이는 곧잘 럭비공처럼 엉뚱한 데로 튀어나가게 마련이다. 슈레이더는 신학과로 진학할 것을 종용하는 부모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컬럼비아대 영화학과를 거쳐 AFI(미국영화학교)로 옮겨감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

그는 마치 프랑수아 트뤼포나 피터 보그다노비치처럼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떨친 다음 영화계로 진입한 인물이다. AFI 재학 당시부터 [시네마]라는 언더그라운드 잡지의 편집장으로 지내면서 매서운 평론들을 줄기차게 발표하더니, 20대 중반에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선구적인 영화연구서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영화 수재의 청춘 시절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지독한 염세주의자인 데다가 알코올중독과 불면증 때문에 술에 잔뜩 취한 채 밤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어두운 나날들. 현재까지도 미국영화사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칭송받는 [택시 드라이버]는 이 당시에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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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의 폴 슈레이더가 알코올중독과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보름 동안 쓰인 시나리오가 바로 [택시 드라이버]다. 그러므로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트래비스 비클의 이미지 속에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던 청년 슈레이더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이 걸작 시나리오는 4년 뒤 마틴 스코시즈에 의하여 스크린으로 옮겨지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택시 드라이버]는 1970년대 초반의 미국사회가 앓고 있던 농익은 상처와 혼란상을 트래비스 비클이라는 특수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영화이다. 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비평적 상찬을 받은 것은 물론,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전위적인 스타일에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이후 슈레이더와 스코시즈의 파트너십은 [분노의 주먹]과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을 거쳐 최근작 인 [비상근무]에까지 이어지며 가장 성공적인 작가-감독 콤비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철도원](1999)과 [블랙레인](1989)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겐이 등장하는 미-일 합작의 일급 액션스릴러 [암흑가의 결투]. 히치콕의 [현기증](1958)과 오즈 야스지로의 [가을이야기](1962)에 대한 오마주로 쓰인 몽환적인 심리 스릴러가 [옵세션]인데, 브라이언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만 경도된 연출을 고집하여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 미국문명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된 또다른 폭력을 다룬 작품이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 리버 피닉스가 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에 의한 억압과 아들의 항거라는 테마는 최근 감독작품인 [어플 릭션](1998)에서 더욱 처참하게 변주된다.

폴 슈레이더는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와 상처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개인의 뒤틀린 내면세계를 눈이 아프도록 응시하고 있는 드문 작가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불면증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려온 것도 이러한 작가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거미여인의 키스](1985)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레너드 슈레이더가 그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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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5년 시드니 폴락의 [암흑가의 결투](The Yakuza) ⓥ
1976년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옵세션](Obsession)
1977년 존 플린의 [롤링 썬더](Rolling Thunder)
1979년 조앤 튜크스베리의 [옛날애인들](Old Boyfriends)
1980년 마틴 스코시즈의 [분노의 주먹](Raging Bull) ⓥ
1986년 피터 위어의 [해리슨 포드의 대탐험](The Mosquito Coast) ⓥ
1988년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90년 시드니 폴락의 [하바나](Havana) ⓥ
1996년 해럴드 베커의 [시티홀](City Hall) ⓥ
1999년 마틴 스코시즈의 [비상근무](Bringing Out the Dead) ⓥ

ⓥ는 비디오출시작

[씨네21] 2000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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