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섀도복싱
니콜라스 카잔(Nicholas Kazan, 1946- )
1999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해프닝은 엘리아 카잔의 평생공로상 수상장면이다. [워터프론트](1954)와 [에덴의 동쪽](1955) 등 사회성 짙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작품들을 줄기차게 만들어온 감독이니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는 것이 당연할 듯도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할리우드를 초토화시킬 무렵 동료들을 밀고한 굴절된 지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덕분에 시상식장의 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게 양분됐다. 그의 수상을 기립박수로 축복해준 부류가 있는 반면 아예 외면해버리거나 야유조의 고함을 질러대는영화인들도 엄존했던 것이다. 나는 그 착찹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문득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닉도 저 자리에 있었을까? 저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박수를 쳤을 것인가 야유했을 것인가?"
니콜라스 카잔은 엘리아 카잔의 아들이다. 그가 만약 한글을 읽을 줄 안다면 자신이 이런 식으로 소개되는 것에 대하여 무척이나 분개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부역 경력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아버지와 연관시켜서 자신이 인식되는 데는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버지는 나의 자랑이자 콤플렉스였습니다. 나는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왔습니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독자적인 시나리오 작가로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 뜻에서 카잔의 필모그래피는 감동적이다. 어떤 뜻에서 그의 작품들은 모두 미국영화사의 거장이자 좌파지식인의 치욕이었던 엘리아 카잔과의 외로운 섀도복싱(Shadowboxing)이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카잔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1930년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프랜시스 파머의 일대기를 다룬 [여배우 프란시스].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데뷔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잊지 못할 사람은 카잔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다. 이 작품으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2류 배우에서 톱스타로 급부상한 제시카 랭, 그리고 그녀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가 실제로 사랑에 빠져 급기야 한 가정을 이루게 된 샘 셰퍼드.
[img2][앳 클로스 레인지]에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두 명의 성격배우 숀 펜과 크리스토퍼 워켄이 돌이킬 수 없게 격돌한다. 오랜만에 출소한 사악한 아버지 워켄이 자신의 아들 펜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의 여자친구마저 겁탈하면서 끔찍한 라스트로 발전해가는 문제작이다.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실화에 바탕을 둔 또 다른 문제작이 [패티 허스트].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한 폴 슈레이더가 감독한 이 작품에서는 테러리스트에게 피납된 재벌가의 상속녀가 자발적으로 은행강도로 변신해가는 과정이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행운의 반전]은 시나리오 작법의 측면에서도 여러모로 주목할만 한 작품이다. [선셋대로](1950)가 ‘죽은 자의 내레이션’을 사용했고, [칼리토](1993)가 ‘죽어가는 자의 내레이션’을 사용했다면, 이 작품은 ‘의식불명상태(coma)에 빠진 자의 내레이션’을 사용했다. 카잔은 ‘미스터리의 해결’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대안을 내놓았는데, 덕분에 관객은 이 영화를 끝까지 보아도 과연 제레미 아이언스(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가 글렌 클로즈를 살해하려 했는지의 진실 여부를 끝끝내 알 수 없다. 할리우드에서 상업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이처럼 과감한 기법들을 도입하다니 카잔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카잔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상황과 캐릭터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컨벤션과 기대치를 철저히 증오하는 작가이다. 그는 엘리아 카잔 못지 않게 좌파적이면서도 엘리아 카잔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모던한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써냄으로써 엘리아 카잔을 극복했다. 그래서일까? 카잔의 독특한 시나리오관은 마치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고해성사처럼 들린다. “나는 특이한 상황에 처한 특이한 캐릭터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루한 관념들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img3]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82년 그레임 클리포드의 [여배우 프란시스](Frances)ⓥ
1986년 제임스 폴리의 [앳 클로스 레인지](At Close Range)
1988년 폴 슈레이더의 [패티 허스트](Patty Hearst)
1990년 바벳 슈로더의 [행운의 반전](Reversal of Fortune)ⓥ★
1991년 마이클 카벨니코프의 [자유시대](Mobsters)ⓥ
1994년 니콜라스 카잔의 [드림 러버](Dream Lover)ⓥ
1996년 대니 드 비토의 [마틸다](Matilda)ⓥ
1998년 그레고리 호블릿의 [폴른](Fallen)
1998년 스티븐 길렌할의 [홈그로운](Homegrown)
1999년 크리스 컬럼버스의 [바이센테니얼맨](Bicentenial Man)ⓥ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6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