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7 17:22:17 IP ADRESS: *.147.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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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닫고 사는 보통사람들
앨빈 사전트(Alvin Sargent, 1952-    )

몇번이고 개봉날짜를 미루더니만 결국 비디오숍으로 직행해버린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보고 있노라니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반반이다. 웨인 왕이 감독하고 수잔 서랜던과 내털피 포트먼이 나와도 그 상업적 가능성을 폄하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시장현실이 안타까웠다면, 아직도 촘촘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는 노익장 앨빈 사전트의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반가웠던 것이다. 사전트의 작품은 언제나 가슴을 저미게 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면서 고품격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앨빈 사전트가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엉뚱하게도 단역배우로서 였다.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에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데 물론 크레딧에는 오르지 못한 수준. 작가지망생으로 방향을 튼 사전트의 데뷔작은 마이클 케인과 셜리 매클레인이 뜨내기 강도커플로 등장하는 코믹 미스터리 스릴러 [갬빗]. 그뒤 그는 현재까지 모두 25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했는데, 격앙된 내면의 감정상태를 절제된 연기로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특히 배우들에게 인기가 높다. 요컨대 배우들에게 최고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사려깊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사전트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줄리아]나 [보통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시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반나치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연하의 작가지망생과 동거하는 황혼의 노작가 제이슨 로바즈, 자신 때문에 형이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폐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소년 티모시 허튼이 모두 사전트와 더불어 오스카를 수상했다.

[페이퍼 문]의 테이텀 오닐을 보면 악 소리가 난다. 껄렁한 어른과 순수한 어린이의 코믹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최신작인 [기쿠지로의 여름](1999)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9살짜리 고아소녀로 나와 깜찍한 연기를 펼친 테이텀 오닐 역시 오스카를 수상했다([페이퍼 문]은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하여 훗날 TV시리즈로도 제작되었는데 이때 주연을 맡아 성가를 드높인 것이 바로 조디 포스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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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가로서 일찌감치 자리를 굳힌 그는 수정가필작업(Additional Writing)의 가장 든든한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별항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제외시켰지만 [추억](1973), [하얀 궁전](1990), [리틀 빅 히어로](1992) 등이 모두 그의 손끝을 거쳐간 작품들이다.

연극연출가로 명성을 떨치던 울루 그로스바드의 영화데뷔작 [출옥자]는 전과자들의 세계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울분을 삭히려 애쓰는 더스틴 호프먼의 절제된 내면연기가 좋다.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는 정신병자인 빌 머레이와 그의 상담의사 리처드 드레퓌스가 펼쳐보이는 요절복통 코미디인데 썰렁한 미국식 유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봐줄 만하다. [최후의 판결]은 살인혐의로 기소된 고급 창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법정드라마인데 너무 장황한 감이 없지 않다.

사전트의 작품들은 특히 가족관계의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내밀한 상처들을 꼼꼼히 묘사해나갈 때 빛을 발한다. 형제들에 대한 편애([보통사람들], [도미니크와 유진])와 마음을 닫고 사는 못된 엄마([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여기보다 어딘가에]) 그리고 동심으로 순화되는 어른들([페이퍼 문], [보거스])에 대한 캐릭터 묘사에서 그를 따라갈 작가는 없다.

그의 작품들은 그러나 돌팔이 의사처럼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위선으로 덧발라놓은 고통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것을 함께 느껴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대화가 없었던 가족이라면 사전트의 작품들을 함께 보면서 그것을 빌미삼아 서로에 대한 말문 트기부터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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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6년 로널드 님의 [갬빗](Gambit)
1970년 존 프랑켄하이머의 [아이 워크 더 라인](I Walk the Line)
1972년 폴 뉴먼의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 Moon Marigolds)
1973년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페이퍼 문](Paper Moon) ★
1977년 프레드 진네만의 [줄리아](Julia) ⓥ ★★
1978년 울루 그로스바드의 [출옥자](Straight Time) ⓥ
1980년 로버트 레드퍼드의 [보통사람들](Ordinary People) ⓥ ★★
1986년 데이비드 앤스포의 [후지어](Hoosiers) ⓥ
1987년 마틴 리트의 [최후의 판결](Nuts) ⓥ
1988년 로버트 영의 [도미니크와 유진](Dominique and Eugine) ⓥ
1991년 프랭크 오즈의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What about Bob?) ⓥ
1996년 노먼 주이슨의 [보거스](Bogus) ⓥ
1999년 웨인왕의 [여기보다 어딘가에](Anywhere But Here)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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