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8-29 22:01:27 IP ADRESS: *.215.2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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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의 포르노그래피
패트리시아 루이지애나 놉(Patricia Louisiana Knop, 1947-    )

뉴욕 화랑의 큐레이터인 엘리자베스는 윌스트리트의 주식 브로커 존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하긴 부와 익명성(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을 갑옷처럼 두른 채 신비한 미소를 짓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어느 여인인들 매혹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남자의 사랑법은 조금 독특하다. 은근히 강간할 의도를 내비치는가 하면 마루 위를 기어가라면서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고 눈을 가리게 한 다음 엉뚱한 음식들을 입에다가 처넣는 식이다. 엘리자베스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차츰 그의 사랑법에 길들여져 간다. 이 매혹적인 뉴욕 여피들의 소프트 SM(사도-마조)적 사랑은 정확히 9주 반 만에 파경에 이른다.

어느 사석에서 [나인하프위크]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된통 ‘쫑코’를 먹은 적이 있다. 영화를 보는 안목도 형편없을 뿐더러 성적인 취향조차 의심스럽다나? 그 자리에서는 웃어 넘겼지만 나의 견해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나인하프위크]는 매혹적인 영화다. CF출신의 감독답게 촬영과 편집도 일품이었고, 잭 니체가 총지휘한 음악도 무척 좋았으며, 킴 베이싱어와 미키 루크도 자신들의 매력을 100% 발휘한 영화가 [나인하프위크]다. 더 나아가 워낙 비주얼과 음악이 뛰어났던 덕에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나리오 역시 대단히 독창적이었다. 단순한 SM영화였다면 흥분과 대리만족에 그쳤을 텐데 이 영화에는 실존적 슬픔이 배어 있다. 글자 그대로 저 흔해 빠진 광고문안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주제를 의뭉스럽게 드러낼 줄 아는 패트리샤 루이지애나 놉의 정교한 시나리오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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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부터 이 방면의 '선수'였던 것은 아니다. 놉의 데뷔작은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 영리한 정치적 선동가로 묘사한 [패스오버 플롯]. 이 영화에서 예수 역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훗날 그녀의 파트너가 된 잘만 킹이라는 사실을 빼고나면 별로 흥미로울 것도 없는 영화다. [레이디 오스카]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처럼 길러져 마리 앙투와네트의 호위병이 된 오스카와 그녀의 첫사랑 앙드레가 프랑스대혁명을 맞아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맞다.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각색하여 영국배우들이 출연하고 프랑스 감독이 연출한 국제 프로젝트다. [북부의 침묵]은 20세기 초 캐나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개척자들의 이야기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정통 드라마이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들 사이를 배회하던 놉이 자신의 전공분야를 분명히 한 것은 물론 세계적인 화제작 [나인하프위크] 이후이다.

[시에스타]는 참으로 묘한 영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스페인에서 나체로 깨어나는 엘렌 바킨의 의식세계를 중심축으로 놓고 있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몽상인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성적인 긴장감과 노곤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일종의 컬트다. [와일드 오키드] 시리즈는 중년 남자와의 일탈된 섹스를 통해 자신의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또다른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젊은 여인들의 이야기. 국내에서도 꽤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렸는데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레드 슈 다이어리]는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출연하는 옴니버스형 성인영화인데, 그 속편이 무려 7편이나 출시되어 그 당시에 동네 비디오 가게의 달러박스였다. 모두 다 에로영화의 작가주의를 선언하며 독립 프로덕션까지 차란 잘만 킹의 작품들이다. [델타 비너스]는 헨리 밀러와 아나이스 닌의 관계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영화인데, 이 역시 놉에게는 익숙한 플롯인 ‘섹스를 통한 여성들의 자기 발견’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놉의 작품들에 대단히 공격적이다. 잔뜩 겉멋을 부리고는 있지만 기껏해야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희화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놉에 대한 나의 불만은 다르다. [나인하프위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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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5년 마이클 캠퍼스의 [패스오버 플롯](The Passover Plot)
1976년 자크 드미의 [레이디 오스카](Lady Oscar)
1981년 앨런 킹의 [북부의 침묵](Silence of the North)
1986년 애드리언 라인의 [나인하프위크](9 1/2 Weeks)ⓥ
1987년 매리 램버트의 [시에스타](Siesta)ⓥ
1990년 잘만 킹의 [와일드 오키드](Wild Orchid)
1992년 잘만 킹의 [레드 슈 다이어리](Red Shoe Diaries)ⓥ
          잘만 킹의 [와일드 오키드 2](Wild Orchid 2: Two Shades of Blue)
1995년 잘만 킹의 [델타 비너스](Delta of Venus)ⓥ

ⓥ는 비디오 출시작

[씨네21] 2000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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