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9-02 20:43:10 IP ADRESS: *.201.17.141

댓글

0

조회 수

4668



[img1]

너무 일찍 성공한 작가
스코트 로젠버그(Scott Rosenberg, 1964-    )

“이틀 안으로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냉혹한 마피아 보스가 당신에게 이런 저주를 내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미 더 세인트와 그 친구들은 떠나지 않는다. 대신 모두 미련하되 의연한(?) 방식으로 각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지미 더 세인트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는 못 말리는 양아치 친구들에게 최대한의 우정을 베풀고,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여인에게는 질투와 회한이 섞인 심정으로 행복을 빌어주고, 자신을 짝사랑해 오던 거리의 창녀에게는 엄마가 될 기회(!)를 주고, 저주를 내린 마피아 보스의 뒤통수를 치는 치명적인 복수를 한 다음, 자신이 운영하던 유언녹취회사에 나가 서글픈 유언을 녹취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게 되었을 때 덴버에서 처리해야 될 몇 가지 일들.’ 원제로는 이렇게 긴 제목을 가지고 있었던 [덴버]는 독특한 신세대 누아르다. 이 영화는 덴버라는 작은 도시에서 모든 촬영을 끝냈지만 신선한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계속 허를 찌르는 작은 반전들로 가득 찬 빼어난 소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고삐리 시절 함께 어울려 다녔던 양아치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 중에는 20대 초반에 일찌감치 변사체로 발견된 놈도 있고, 의외로 떼돈을 벌어 몰라보게 변한 자식도 있다. [덴버]를 보고 있으면 그 징글징글한 옛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바다 한복판에서 그들과 다시 어울려 “보트 드링크!”라고 외치며 거나하게 취해보고 싶어진다.

[img2]

모처럼 정서가 통하는 신세대 누아르 작가가 탄생했다고 즐거워하며 스코트 로젠버그의 다음 작품을 찾아보니 이번에는 또 색깔이 전혀 다르다. [뷰티풀 걸]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고교동창생들 사이의 엇갈린 사랑찾기를 그린 코믹한 청춘스케치. 한 마디로 남성판 [사랑을 기다리며]같은 작품인데 우마 서먼, 미라 소비노, 내털리 포트만 등 당대의 미인들이 사랑을 갈구하는 어리숙한 남자친구들의 혼을 쏙 빼놓는 영화다. 이쯤에서 로젠버그의 재능을 재빨리 간파한 사람이 바로 돈 심슨과 더불어 현대 블록버스터의 컨벤션들을 확립한 저명한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 [더 록]을 찍는 동안 환상의 콤비였던 돈 심슨이 마약 과용으로 세상을 떠나자 불안한 홀로서기를 모색하고 있던 그는 차기작인 [콘에어]의 시나리오 작가로 로젠버그를 점찍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7년의 박스오피스 집계에서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로젠버그는 [콘에어]를 통해 마치 데이비드 코엡처럼 ‘너무 일찍 성공한 작가’가 돼버렸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콘에어]의 시나리오가 [덴버]의 시나리오보다 우수한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덴버]에서 보여줬던 빛나는 개성은 간데없고 그저 블록버스터의 컨벤션들을 빠짐없이 열거해 놓은 범작이 [콘에어]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레코드가게를 운영하는 노총각 음악광 존 쿠색의 좌충우돌 연애담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세련된 로맨틱 코미디 소품인데 반해,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하고 니콜라스 케이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블록버스트 [식스티 세컨즈]는 볼 때는 신나지만 막상 극장 문을 나오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속 빈 영화였다. 로젠버그가 블록버스터로는 돈을 챙기고 정작 자신의 작품은 소품으로 승부하겠다고 결심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저 제작자한테 끌려다니기만 하는 시나리오 작가로 전락하고 있다면 서글픈 일이다. 그런 뜻에서 올해의 필모그래피에 자신을 데뷔시켜 준 게리 플레더가 저예산으로 만든 인디계열의 SF영화 [임포스터]가 끼어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로젠버그의 차기작으로 예약돼 있는 것은 그동안 찍는다 안 찍는다 말도 많았던 블록버스터 유형의 영화 [스파이더 맨]. 2002년 개봉을 목표로 현재 데이비드 코엡와 함께 공동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img3]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5년 게리 플레더의 [덴버](Things to Do in Denver When You're Dead)ⓥ
1996년 테드 드미의 [뷰티풀 걸](Beautiful Girls)ⓥ
1997년 사이먼 웨스트의 [콘에어](Con Air)ⓥ
1998년 데이비드 뉴터의 [위험한 행동](Diturbing Behavior)
2000년 스티븐 프리어즈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도미니크 세나의 [식스티 세컨즈](Gone in 60 Seconds)ⓥ
          게리 플레더의 [임포스터](Imposter)

ⓥ는 비디오 출시작

[씨네21] 2000년 11월 7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 시나리오의 3대 요소? 구조, 구조, 구조!/William Goldman(1931- ) + 6 file 심산 2006-09-05 6456
» 너무 일찍 성공한 작가/Scott Rosenberg(1964- ) file 심산 2006-09-02 4668
44 거친 사내의 아메리칸 드림/Joe Eszterhas(1944- ) file 심산 2006-09-02 3995
43 고칠 수 없을 때까지 고쳐쓴다/Bruce Joel Rubin(1943- ) file 심산 2006-09-02 4035
42 그대 안의 포르노그래피/Patricia Louisiana Knop(1947- ) file 심산 2006-08-29 4610
41 손맛을 신봉하는 정공법의 달인/Bo Goldman(1932- ) file 심산 2006-08-29 3800
40 고통과 냉소의 저술광/Frederic Raphael(1931- ) file 심산 2006-08-29 3679
39 블랙리스트 작가의 멋진 복수극/Walter Bernstein(1919- ) file 심산 2006-08-29 4578
38 흑백TV시절 안방극장의 단골손님/Daniel Taradash(1913-2003) file 심산 2006-08-29 4002
37 전세계의 감독들을 지휘하다/Jean Claude Carriere(1931- ) + 1 file 심산 2006-07-27 3974
36 마음을 닫고 사는 보통사람들/Alvin Sargent(1952- ) file 심산 2006-07-27 4971
35 인간의 심연을 파고드는 스릴러/Ted Tally(1952- ) file 심산 2006-07-27 4005
34 담담히 지켜본 한 계급의 소멸/Ruth Prawer Jhabvala(1927- ) file 심산 2006-07-27 3792
33 아버지와의 섀도복싱/Nicholas Kazan(1946- ) file 심산 2006-07-27 3935
32 만화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다/David Goyer(1968- ) file 심산 2006-07-25 3875
31 미국 남부의 정서와 풍광/Horton Foote(1916- ) file 심산 2006-07-25 4308
30 무성영화시대를 통과하여 살아남은 장인/Ben Hecht(1893-1964) file 심산 2006-07-25 3899
29 개성 없다고? 기다려봐!/Eric Roth(1942- ) file 심산 2006-07-25 3609
28 상처를 응시하는 불안한 눈동자/Paul Schrader(1946- ) file 심산 2006-07-12 4066
27 뒤틀린 코미디의 썰렁 브라더스/Scott Alexander(1963- ) & Larry Karaszewski(1961- ) file 심산 2006-07-12 3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