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slow slow"
나의 삶을 뒤돌아 본다면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로 말할 것이다. 10여년 신문사,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사회 현장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아왔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그냥 앞만보고 달리고 달린 것이다.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도 나를 찾아보기 힘든 하루하루 였다. 그러던 어느날 난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뭐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천천히 내가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걷기’였다. 제주 올레길부터 지리산 둘레길까지 천천히 호흡하고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스페인의 순례자길이었다.
40여일 걸을 수 있는 짐을 배낭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나의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를 챙겨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떠나온 길. 베낭에 카메라 가방을 동여 메고 긴 숨고르기를 한번 한후 발을 내 딛었다. 생각보다 상쾌하다. 간간히 보이는 마을 주민들이 나에게 '부엔 카미노'라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부엔 카미노 -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보통 '길 잘 걸으세요'라고 해석하면 된다.)
첫날의 여정,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순례자길중 가장 어렵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오르막이 시작된다. 출발할때의 상쾌함은 이미 없어지고 거친 숨과 더딘 발걸음만 계속된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출발 전부터 않좋았던 어깨가 시작부터 말썽인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때마다 통증이 심해진다.
한 시간쯤 올라갔을까. 도저히 걸을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난 그 자리에서 푹 주저앉아 멍하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걸어온 길을 돌아 본다. 내가 출발한 마을이 저 언덕 아래 있다. 겨우 2km 왔을까. 순간 내 머리 속은 수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언덕 밑에서 작은 체구의 이탈리아 할아버지 한 분이 (거의 거북이 속도로) 올라온다. 베낭을 양손에 바짝 당기며 천천히 올라온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보인다. 겉 모습으로는 나 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할아버지는 내 앞에 잠시 멈추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숨가뿐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slow slow slow"
그리곤 다시 베낭을 움켜 잡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을 다시 걷는다. 순간 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여러가지의 감정들이 생겼다. 용기,희망,등등 긍정적인 단어를 모두 동원해도 표현 할 수 없는 감정. 난 할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베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묵직한 느낌의 카메라를 손에 쥐고 천천히 발을 내 딛었다.
p.s 그 후 40일이 지난 후 내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할아버지를 산티아고 거리에서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나를 힘껏 안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힘껏 껴안았다.
사진작가 김진석
[좋은생각] 201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