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상큼한 그대
심산의 와인예찬(3)
소비뇽 블랑으로 만들어진 와인들
그때 나는 스물 일곱 살이었고 그녀는 열 일곱 살이었다. 무슨 원조교제 스토리도 아니고 어떻게 열 일곱 살의 소녀를 만날 수가 있었냐고? 그녀는 당시의 내 애인이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 애인이 그녀의 과외 선생이었던 것이다. 애인은 그 아이를 내 앞으로 불쑥 들이밀며 뜻 모를 이야기를 던졌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데리고 나왔어. 나는 멋쩍게 피식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어하며 투덜댔다. 맙소사, 날더러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고딩하고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누라는 거야?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녀는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소녀들이 흔히 그러하듯 눈을 내리깐 채 흘낏 흘낏 나를 엿보며 수줍게 말을 이어갔다. 생각보다는 키가 작으시네요. 존심이 상한 나는 짐짓 어른스럽게 목소리를 깔았다. 학교 다니기 정말 싫으시죠?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이름이?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줬다. 그 이름을 ‘소비뇽(Sauvignon)'이라고 해두자. 우리 셋은 그렇게 기이한 삼각 데이트를 몇 번 즐겼다. 적어도 애인이 나를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왜 애인과 헤어졌냐고는 묻지 말아달라. 세상에는 애인들이 헤어져야만 되는 이유가 백만 가지나 존재한다. 어찌되었건 애인은 떠나갔고 그녀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소비뇽도 자연히 잊혀졌다.
소비뇽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녀가 스무 살 때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거의 삼십년 동안 나의 나와바리는 신촌이다. 그날도 낮술에 취해 신촌 거리를 하릴 없이 배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여름의 눈부신 햇살 아래 취기까지 더해져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비현실적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야릇한 풍경의 저 건너편에서 근사한 몸매의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미니 청치마에 나시티 그리고 큼지막한 썬글래스를 걸친 모습이 흡사 유럽의 패션잡지 속에서 뛰쳐 나온 것 같다. 이 친구 정말 잘 빠졌군, 하며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그녀가 내 팔을 덥썩 잡아 세운다. 나 기억 안 나요? 나는 당황했다. 그녀는 썬글래스를 벗어보이며 활짝 웃었다. 이래도 모르겠어요? 아, 아, 아...그녀의 이름이 내 목젖에서 맴돈다. 하지만 그녀가 실망의 빛을 띄우기 전에 나는 잊혀졌던 그 이름을 기억해내고야 만다. 소비뇽...그래, 소비뇽! 너 소비뇽 맞지?!
소비뇽은 북한산 자락의 어느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곧 휴학을 하고 길고 긴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내가 그녀와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즐기게 된 것은 소비뇽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 신촌에 있는 다른 대학의 미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즈음이었다. 그녀의 대학원과 나의 집필실이 바투 붙어 있었던 까닭에 우리는 아무 때나 만났다. 그녀는 떡볶이 따위를 사들고 불쑥 내 집필실로 찾아와 제멋대로 수다를 떨어댔고, 나는 글을 쓰다가 막힐 때면 예쁘장한 그녀 학교의 캠퍼스로 찾아가 함께 산책을 즐기곤 했다. 당시의 소비뇽은 더 없이 아름다운 처녀였다. 하긴 예술적 재능과 포부가 넘쳐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꿈과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데 그 어떤 처녀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뒤돌아보면 소비뇽과의 인연은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져 왔다. 그녀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강남의 큰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부터 우리의 만남을 다시 뜸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신촌 부근에 자신만의 디자인 회사를 차리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가장 멋진 친구라고 부른다. 나는 그녀의 카운슬러였고 멘토였으며 어떤 뜻에서 일종의 남자친구 대역(代役)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전애인의 과외 학생이었고, 까마득한 후배였다가, 귀여운 대화상대를 거쳐, 유쾌한 술친구로 변해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긴 세월을 띄엄띄엄 만나오는 동안,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고 급기야는 온몸에 빗물이 주룩주룩 흐르게 되듯,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생겨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는 그냥 가슴 속에 담아두는 것이 훨씬 나은 일들도 많다. 절제하지 못하여 기어코 낭패를 맛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소비뇽과의 만남들 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싱가폴의 한 특급호텔에서였다. 그곳에서 개최된 세계 디자인 박람회에 나란히 참가한 우리는 객실을 하나만 잡았다. 더블베드가 있는 룸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내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소비뇽은 깔깔대며 어긋짱을 놓았다. 이러지 마, 이상해. 내가 진지하게 그녀를 끌어안자 소비뇽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밀쳐내고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형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 이러면 우리 다음부터 얼굴 못 봐.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던 것 같다. 난 한번도 형을 남자로 생각해본 적 없어. 미안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젊었을 때는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나이가 들면 쉬이 넘어간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흘러간 세월 속에는 함께 해온 순간들이 녹아들어 있어 사람의 표정을 온화하게 만든다. 그날 밤 싱가폴의 호텔에서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쩌면 치욕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보냈는지도 모른다. 싱가폴에서 돌아온 다음 우리는 한 동안 만나지 않았다. 실망과 상처가 아물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이따금씩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소비뇽은 어느 새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나이보다 열 살을 더 먹어 버렸다. 누구나 그러하듯 먹고 사는 일에 지쳐 남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얼마 전 소비뇽은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따져보니까 내 평생의 절반 이상을 형과 함께 보냈네? 고마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친구로 남아줘서.
[img2]소비뇽이라는 이름을 가진 포도 품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레드와인용으로 쓰이는 카베르네 소비뇽이고, 다른 하나는 화이트와인용으로 쓰이는 소비뇽 블랑이다. 풀네임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소비뇽’이라고 부를 때는 후자를 뜻한다. 소비뇽 블랑 단일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프랑스 루아르 강 유역에서 생산하는 푸이 퓌메(Pouilly Fume)다. 하지만 나는 이 품종에 관한 한 천박하게도 신세계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을 훨씬 더 좋아한다. 뉴질랜드 말보로에서 만든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만든 퓌메 블랑(Fume Blanc)이 내 입맛에 딱 맞다. 퓌메 블랑은 상큼하고 모던하다. 클라우디 베이는 심플하고 청량하다. 소비뇽 블랑은 매혹적인 도발이고, 거칠 것 없는 청춘이며, 톡톡 쏘는 자극이 일품인 와인이다.
퓌메 블랑을 음미하며 이 와인은 누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곰곰이 떠올려봤다. 그게 소비뇽이다. 어쩌면 소비뇽을 생각하며 그녀가 어떤 와인을 닮았는가를 떠올린 것일 수도 있다. 순서야 어찌되었든 상관없다. 내 기억과 입맛 속에 남아 있는 소비뇽은 언제나 젊고 발랄하며 상큼하다. 꽃은 지고 여자는 시들며 젊음은 흘러간다. 하지만 소비뇽만은 언제나 눈부신 젊음으로 남아있다. 헬로 소비뇽, 요즈음 너무 많이 지쳐 보여서 내 맘이 안쓰러워. 누구에게나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가질 수 없는 것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지는 말자구. 그럴 땐 세월을 붙잡아둔 상큼한 와인을 한 잔 하고 가벼운 기분이 되는 게 상책이야. 소비뇽의 진정한 맛은 나이 든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지. 이번 주말에는 함께 늙어가는 좋은 친구와 함께 소비뇽 한 잔, 어때?
일러스트 오현숙[무비위크] 2006년 12월 4일
친구들 와서 오이도에서 조개 사다가 화이트 와인이랑 먹기로 했는데
저한테 딱 필요한 내용이네요. 이마트에 있을랑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