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우아함과 싱그러운 과일향
심산의 와인예찬(7) 샤르도네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들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장편소설 <아름다운 패배자들(Beautiful Losers)>을 펼치면 맨 앞장에 그가 남긴 인상적인 헌사가 쓰여 있다. “내가 욕망하였으나 가질 수 없었던 여인들에게.” 짧은 독해 능력 덕분에 책보다는 사전을 더 많이 뒤적거리며 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이상하게도 그 한 마디는 늘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상념에 잠긴다. 내게도 그런 여인들이 있었던가. 있었다. 당연히 많았다. 하지만 ‘욕망하였으나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욕망한다는 표현조차 할 수 없었던’ 여인은 단 한 명뿐이다. 그녀의 이름을 샤르도네(Chardonnay)라고 해두자.
샤르도네를 처음 본 것은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에서였다. 내가 존경하는 한 시인 선배가 난데없이 웬 현대무용을 함께 보자고 해서 끌려 나가다시피 한 자리였다. 왼쪽에서 세 번째, 쟤 보여? 쟤가 샤르도네야. 처음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무용수답지 않게 아담한 몸피를 가진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갑자기 무대 앞으로 나서며 독무를 펼쳐 보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억(!) 소리를 낼 뻔 했다. 샤르도네는 발레리의 무희였고 정현종의 발레리나였다. 그녀가 무대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는 순간, 시공간은 야릇하게 왜곡되어 그녀를 두둥실 허공에 매달아버렸다. 아마도 나의 착시현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지껏 샤르도네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천하의 마이클 조던이라 해도 그녀보다 더 긴 체공시간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img2]단순히 빼어난 무용솜씨에 반하여 그녀를 욕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치한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내가 샤르도네에게 빠져든 것은 공연이 끝난 다음의 뒷풀이 술자리에서였다. 그녀는 우아했다. 고전적인 용모와 균형 잡힌 몸매에서는 기품이 우러나왔다. 이따금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할 때면 그녀 가슴 속에 숨겨진 뜨거운 열정과 겸손한 성품이 더 할 수 없이 멋지게 어우러져 내 영혼을 마구 뒤흔들었다. 나는 술좌석의 한 귀퉁이에 끼어 앉아 그녀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명치 끝을 인두로 지지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혼란과 전율 혹은 공포였다고 표현해도 좋으리라. 그래서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와 저 혼자 꽁무니를 빼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따금씩 그 순간을 돌이켜본다. 나는 왜 그때 샤르도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간단하여 우습기조차 하다. 당시의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신랑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아마도 샤르도네를 훔쳐보며 제멋대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여자를 만난다면 내 결혼생활은 결국 파경에 이르게 될 거야. 이 여자는 내 삶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게 될 거야. 어쩌면 터무니없는 공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주 분명하게 ‘위험’을 느꼈다. 그래서 바보처럼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 것이 결국 잘한 일이었는지의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도망쳤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샤르도네는, 내 선배 시인이 예견한 바 그대로, 독창적인 무용세계를 일군 발군의 현대무용가로 우뚝 섰다. 나는 이따금씩 그녀의 사진이 실린 잡지들을 뒤적이며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거의 13년이 흐른 다음,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 우리는 우연히 다시 만났다. 우리는 바로 옆 테이블에 따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를 알아봤지만 샤르도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살며시 우리 테이블로 와서는 나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 혹시...저 기억하세요? 다음 순간, 우리는 각자의 일행들을 동시에 배신(!)하고 창가에 따로 떨어져 있는 빈 테이블로 옮겼다. 그리고 나는 위에 언급한 모든 이야기를 샤르도네에게 해줬다(뻔뻔스럽게 솔직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렇게 웃는 샤르도네는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그때 서운했어요,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보고 싶었는데, 간다는 말씀도 없이 그냥 가버려서요.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마치 십년지기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가볍게 상기된 얼굴에서 미열이 느껴져 카페의 유리창을 살짝 열어놓을 때는 김수영의 시 <미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샤르도네는 그 사이에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에 성공했다며 애잔하게 웃었다.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무대 위에 오르기가 두렵다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작별인사를 고하려는 순간, 샤르도네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포장마차의 차양을 들췄다. 생굴에 소주 한 잔, 어때요? 그때 도망친 죄값으로. 나는 생굴을 포장해달라고 해서 들고 나오며 말했다. 생굴은 좋은데, 술은 다른 걸로 합시다. 샤르도네는 교감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샤블리(Chablis)요?
[img3]“만약 샤르도네라는 품종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와인 동네에서는 널리 알려진 오래된 격언이다. 샤르도네(chardonnay)의 고향은 프랑스 부르곤느다. 부르곤느 중에서도 샤블리가 가장 유명한데, 그 드라이한 신맛과 기품 있는 과일향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아예 하나의 독립된 장르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샤블리와 최고의 궁합(marriage)을 이루는 음식이 바로 석화(굴)다. 푸이 퓌세(Pouilly Fusse) 역시 샤르도네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들 중에서 단연 백미로 꼽히는데, 최근 빅히트한 한국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 바 있다. 포커스 아웃된 상태여서 와인병의 라벨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색깔과 형태만으로도 그것이 루이 막스(Louis Max)가 만든 푸이 퓌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우리는 인사동과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샤블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 허름한 와인집에서 샤블리 그랑 크뤼 보데지르(Vaudesir)를 발견한 것은 예기치 못했던 행운이었다. 샤르도네와 마주 앉아 보데지르 한 병을 천천히 비워내던 그날 밤은 마치 감미로운 꿈처럼 내 가슴에 남아 있다. 헬로 샤르도네, 그날 정말 반가웠어요. 이번 삶에서의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다행히도 샤르도네가 남아 있어 그다지 쓸쓸하지는 않을듯 하네요. 이따금 샤르도네를 마실 때면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우아하고 근사한 사람으로 남아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죠. 당신은 무대 위에서 허공에 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워요. 부디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무대 위에 오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미로웠던 그날 밤의 샤블리를 추억하며 건배.
일러스트 이은[무비위크] 2007년 1월 29일
저도 그녀를 만났더랬지요, 그녀는 제게도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