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2-08 01:45:04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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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연약한 소녀와 농염한 여인
심산의 와인예찬(8) 피노 누아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들

이따금씩 나이 든 여자 안에서 소녀를 본다. 그 소녀는 더 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너무 섬세하고 연약하여서 과연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소녀 안에서 소녀를 본다는 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소녀가 나이 든 여자 안에서 오롯이 살아있는 경우이다. 그때 느끼게 되는 신선함과 당혹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하지만 그녀 안에서 다만 미성숙함과 부서지기 쉬운 위태로움만을 감지한다면 당신은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누아(Noir)라고 해두자.

내가 누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야말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꿈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나는 가슴 한켠에서 미열과도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아수라의 시장바닥에서 삶을 영위해온 ‘닳고 닳은’ 인생 선배가 남 몰래 느끼는 연민이다. 이제 곧 저 아이는 세파에 시달리며 마모되어 가겠지. 저 꿈꾸는 듯한 눈망울로는 못 볼 것들을 보게 되고, 저 섬섬옥수 하얀 손에 침을 묻혀가며 더러운 지폐들을 헤아리게 되겠지. 내가 누아에게서 느낀 첫 번째 인상은 그녀가 부서지기 쉬운(fragile)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부서지기 쉬운 것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섬세한 아름다움이 그저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면 더 이상 누아가 아니다. 소녀는 처녀가 되면서 소녀를 잃어버리고, 처녀는 아내가 되면서 처녀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누아는 누군가의 아내가 된 이후에도 소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누아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누아를 지켜봤다. 나는 누아가 이른바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을 때 그녀가 지어보이던 그 해맑은 소녀의 미소를 기억한다. 누아가 결혼이라는 것을 했을 때에는 그녀의 순백색 웨딩드레스가 마치 포토숍으로 처리한 듯 뽀사시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누아는 ‘결혼한 여자’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은 곳에서 저 혼자 놀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이따금 누아 부부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놀려먹곤 했다. 넌 어떻게 결혼까지 한 애가 아직도 여자 중학생 같냐?

누아가 겸연쩍게 웃으며 얼마 전에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 이혼했냐는 따위의 이유도 묻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도 별다른 합리적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거늘 이혼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 하랴. 누아는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한 채 끝 없이 맥주를 마셔대며 말했다.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그녀는 노가리의 뼈를 발려 내게 내밀며 싱긋 웃었다. 단지 이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도 행복해진다는 게 믿겨지세요? 누아는 버릇처럼 정신을 잃기 직전에 예의 그 소녀처럼 꿈꾸는 눈망울을 한 채 10년 전과 똑같은 포부를 밝혔다. 난 진짜 멋진 작품 만들 자신 있어요, 진짜 멋진 작품! 내게는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잔뜩 취한 그녀가 술자리에 길게 누운채 뻗어버린 것이다.

[img2]

나는 그녀를 내 등에 업었다. 누아가 처녀일 때부터 이따금씩 해왔던 짓이다. 그녀의 집은 전형적인 강북식 골목길 저 끝에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다음에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누아는 성숙한 여인의 멋진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등에 업힌 그녀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누아는 내 목에 쌔근쌔근 콧김을 쏘이며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옮겨 업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답지 않게 별이 총총했던 기억이 난다. 누아를 침대에 눕히고 홑이불을 덮어준 다음 나는 한 동안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것은 이혼녀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녀였을 뿐이다. 어이없게도 불현듯 그녀가 딸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누아의 귓볼에 입술을 바짝 들이대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인사말을 건넸다. 슬립 타이트, 스위트 베이비.

가까운 곳에 있는 보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누아는 드라마 연출자였다. 그녀가 자신의 데뷔작을 DVD로 구워 내게 전해주었을 때에도 나는 무심하게 받아서 책꽂이 한켠에 밀쳐두며 의례적인 대꾸를 해주었을 뿐이다. 어, 그래 수고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볼께. 누아가 4부작 드라마를 찍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며 드라마 대본 따위에 목숨을 걸고 있는 내 후배들이 어떻게 아직도 그걸 안볼 수가 있느냐고 닦달을 해대도 나는 심드렁하게 딴청을 피웠을 뿐이다. 나 원래 테레비 안 봐. 테레비 드라마 같은 걸 볼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잠을 자겠다. 그러다가 어느 하릴없는 휴일 오후, 꼭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 DVD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게 되자, 나는 궁여지책으로 누아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율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드라마였다. 흔히 말하는 방송 드라마의 빤한 컨벤션들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비틀어가며 ‘놀고’ 있었다. 캐릭터들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했고, 촬영과 편집은 도발적이었는데, 그 모든 요소들을 ‘모호하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주제로 아우르는 연출력이 단연 돋보였다. 나를 단연 놀라게 한 것은 삶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통찰이다. 그 드라마를 만든 사람은 내가 아는 누아가 아니었다. 아니 나는 그제서야 누아의 전체를 보게 되었다. 누아는 꿈꾸는 소녀인 동시에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술가였고, 삶의 쓰라린 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었으며, 누구 못지않게 관능적이고 농염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피노 누아(Pinot Noir)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포도품종들 중의 하나다. 고대 로마시대에 이미 헬베나시아 미노르(Helvenaia Minor)라 불리웠으며 품질 좋은 와인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피노 누아는 ‘까다로운’ 품종으로 유명하다. 기후에 큰 영향을 받고, 봄날 서리에 민감하며, 곤충들이 가장 좋아하는 숙주이기도 하다. 껍질이 너무 얇아 쉽게 쪼그라들기 일쑤이고, 발효시에는 너무 맹렬히 끓어올라 넘치기도 하며, 쉽게 산화되어 고유의 아로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한 마디로 너무 섬세하고 연약한 품종이어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붓지 않으면 제대로 피어날 수 없는 소녀와도 같다. 하지만 제대로 개화될 경우에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이 된다.

[img3]

현대 피노 누아의 메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프랑스의 부르곤느(Bourgogne)다. 그 이름만으로도 전세계 와인매니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 샹베르탱(Chambertin), 리슈부르(Richeboirg) 등이 모두 피노 누아 단일품종으로 만든 와인들이다. 하지만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가격이 ‘기절할만한’ 수준이다. 미친 척하고 코르크를 딴다 해도 그 맛을 보장할 수 없다. 워낙 빈티지와 제조공정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피노 누아를 만나게 되면, 그 이전에 마셨던 모든 와인들은 기억 속에서 가뭇없이 스러져버리기 마련이다. 피노 누아는 부드럽고 농염하며 강렬하다. 성숙한 여인 속에 남아있는 연약한 소녀이며, 앳된 소녀 속에서 발견하는 농염한 여인이다.

얼마 전에 누아를 만나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칭찬에 어색한 듯 수줍게 볼을 붉히며 연신 맥주를 퍼마시더니 역시 또 기절하여 내 등에 업히고 말았다. 누아는 누아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취향 역시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내가 시라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고개를 외로 틀었다. 시라는 강렬한 대신 복합적인 맛이 부족한 거 같아요. 그러면 너는 뭘 좋아해? 라고 물었더니 누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바로 맞받아쳤다. 당근 누아죠, 피노 누아! 그래 알았어 누아, 담에 만나면 우리 피노 누아를 한 병 따자구! 대신, 한 달 정도는 굶을 각오를 해야 되겠지?^^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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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2.08 01:52
*.235.170.238
내가 마감시간에 턱걸이(!)로 넘기는 바람에...이은이 일러스트를 제대로 그릴 시간이 없었다는...그래서 이은이 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다는...미안, 은! 담부터 빨리 써줄께...^^

이미경

2007.02.08 02:21
*.77.224.15
저번게 너무 좋았어요... 와인예찬 볼려고 한달을 너무나 열심히 기다렸는데...저번게 너무 좋았나봐요...

김희자

2007.02.08 11:24
*.134.45.41
누아, 누굴까? 갑자기 궁금해지넹.. 크큭.. 물론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심정욱

2007.02.08 13:33
*.216.70.254
로버트 몬다비 밸리의 피노누아가 가격이 "적당한" 선인가요? 아니면 한 달 굶어야할 정도...??
피노누아 품종의 와인 한번 마셔보고 싶어서....저렴한 선을 찾느라 신의 물방울 뒤에 소개되어있는 와인리스트 보다가....3천엔대의 피노누아 산타마리아 (캘리포니아산)가 소개되어있어 구매하고자하였으나...(물론, 국내에선 두배 가량의 가격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 상품은 없고 로버트몬다비 밸리 제품만 있다고 해서...발길을 돌렸는데...왜 가격을 안 물어봤는지 싶네요. --;;; 저기 일러스트에 있는 것 봐서....가격을 아실 것 같아 여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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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2.08 14:40
*.131.158.75
정욱, 저건 별로 안 비싸...소매가격 38,000원 정도? 대신, 본문에 언급한 와인들이 말도 안되게 비싸지...미국 워싱턴주에서 만드는 피노 누아도 마실만해, 아니 썩 훌륭해!(근데 왜 부르곤느가 아니면 피노 누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지...ㅠㅠ)
희자, [와인예찬]에 나오는 여인들은 '이미지'라니깐? 성은 이씨고 이름은 미지...^^

한수련

2007.02.08 14:42
*.235.170.238
난 선생님이 '이미지'씨들을 어떻게 조합해 새로 만들어내시는지 이제 알것 같아요. ^^
피노누아 와인 이름 중에 제일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글 중에 이 글이 제일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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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7.02.08 23:21
*.86.217.161
수련! 난 아냐!
난 솔직히 심산의 와인 예찬 (1) 쉬 워즈 쉬라즈
가 최고였어.

두루엉 Drouhin의 피노누아를 처음 마셨을 때.....
그 지린내 나면서도 독특한 맛이 웬지 좋았다.

심샘.....뭘 자꾸 변명을 하셔요?
자꾸 그러니까 더 의심스럽잖아요. ㅎㅎㅎ
profile

조상범

2007.02.09 02:13
*.5.163.122
피노누아. 사이드 웨이의 마일즈가 피를 토하며 경탄하던 바로 그.
여리고 까다롭기에 지속적으로 애정을 줘야 했었던 지난 나의 옛날 이야기 속 그녀들이 떠오르네요.

최은영

2007.02.10 16:20
*.1.126.66
저는 어제서야 비로소 심산의 와인예찬을 다 읽어보았답니다. 제가 쪼금(?) 늦다는 건 선생님께서 이미 다 아실 것 같고...
스크린으로는 글을 잘 못 읽어서리 모두 다 프린트 해서 읽었지요.

느낌
1. 참 재밌다
2. 아무래도 상상이 가미된 논픽션으로 보인다.
3. 와인의 이미지가 확 와닿는다.
저는 수업 듣기 전 보다 지금 읽은 게 더 다행(?)인 것 같아요. 제가 와인을 그리 많이 마신 게 아니라서 어떤 느낌이 있다고 말하기는 좀 섣부르지만 저 나름의 느낌에 선생님의 글이 보태지니 각각의 와인이 화악~ 와 닿네요. 글라스에 담겨 있던 와인이 스르륵 살아나는 것 같아요.

우리 와인반 중에서 매치를 시켜본다면...
시라는 선모양이...
메를로는 영모양...
피노누아는 숙모양이...
뭔가 이미지가 좀 ... 저만의 생각이었슴다.
사람도 와인도 좀 더 겪어 봐야겠습니다.

김은연

2007.02.09 18:19
*.58.10.63
일러스트 멋있어요. 와인하고 색감이 넘 잘 어울려요. ~~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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