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이면 족하다
심산의 와인예찬(9) 스페인의 식전주 셰리
나는 내가 만났던 모든 여인들을 기억한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투, 그들의 손짓, 그들의 몸놀림, 그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 아로새겨 넣으려 애쓴다. 그리하여 어느 나른한 오후, 추억의 도서관을 하릴없이 배회하다가 문득 기억의 갈피를 되새기며 저 혼자 미소 짓곤 하는 것이다. 그때 그녀가 입었던 빛 바랜 청바지는 얼마나 예뻤던지. 그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하얀 목양말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모든 남녀의 만남은, 마치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러하듯, 순간에 불과하다.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무의미하되, 순간적인 차원에서는 더 없이 따사롭게 타오르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듣게 되는 가장 어리석은 질문은 그런 것이다. 어차피 내려올 걸 뭘 그렇게 낑낑대며 올라가세요?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그렇게 아둥바둥 살고 있어요? 남녀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헤어진다. 바로 그래서 만나는 그 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헤어진 다음에는 기억 혹은 추억만이 소중하게 남는다.
그러므로 헤어진 여인은 헤어진 여인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고, 그래서 내가 간직하고 있던 기억들마저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다. 어라? 이런 이야길 하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하려던 이야기인즉슨 단순하다. 나는 내가 만났던 모든 여인들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런데 이름 석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을 셰리(Sherry)라고 하자.
셰리를 만난 곳은 내 화가 친구의 전시회 오프닝 파티가 열렸던 논현동의 한 화랑에서였다. 써놓고 보니 녀석을 ‘화가’라고 불러도 되는지 조금 의심스럽긴 하다. 녀석은 “키치로서 키치를 비웃는” 해괴한 작업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날 오픈한 전시회 역시 그런 컨셉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어서 한 마디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파는 싸구려 짜가테이프 음악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고, 변두리 캬바레의 천장에 붙어 있어야 어울릴법한 유치찬란한 조명이 번쩍거리고, 작품이랍시고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놓은 것들은 고물상에서도 찾기 힘들법한 해괴한 오브제들뿐이었던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오프닝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드레스 코드였다. 주말마다 여의도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는 중딩들의 코스프레 파티도 그보다 더 정신없을 순 없었다. 번쩍이는 권투선수용 트렁크에 할로윈 가면을 쓰고 온 놈이 있질 않나, 구닥다리 웨딩드레스를 무지개빛 색깔로 염색해서 입고 온 년이 있질 않나, 여하튼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파티였다. 다행히 말도 안되는 칵테일 기법(!)으로 만든 싸구려 폭탄주를 몇 잔 들이키니 그 ‘맨정신’이라는 놈이 외출해주었다. 어느 새 나 역시도 괜히 킬킬대고 배가 아프게 웃어대며 그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img2]셰리가 언제쯤 등장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파티가 끝날 때쯤 나와 뒤엉켜 구석에 찌그러진채 하염없이 술을 마셔대던 여자가 셰리였다. 개차반으로 취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녀가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할 수 있었다. 셰리의 드레스 코드는 <공각기동대>와 <카우보이 비밥>을 뒤섞어 놓은듯한 것이었는데, 초록색 그물망 스타킹과 가죽으로 된 초미니스커트 그리고 키메라처럼 정신없는 눈화장이 더 없이 근사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는 연결되지 않는 몇 개의 컷으로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2차는 생맥주집이었던 것 같고 3차는 노래방? 아니 어쩌면 단란주점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둘이 남은 우리는 싸구려 모텔방에서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원 나잇 스탠드에는 흥분이 있다. 블라인드 데이트 특유의 스릴과 설레임 그리고 속전속결의 성취감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원 나잇 스탠드에는 후회가 있다. 특히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깨어난 다음에는 자신이 흡사 타인처럼 느껴지는 낯설음 때문에 제 발등을 찧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 나잇 스탠드에는 나름대로의 윤리가 있다. 한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며칠이 지난 다음 셰리가 불쑥 내 작업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문 밖에 서 있던 그녀가 셰리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수한 면티에 청바지를 걸치고 화장 안한 얼굴에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에게서 며칠 전 그 광란의 파티 속 여인을 읽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의례적인 인사치례와 영어회화식 대사들. 그녀가 침묵의 행간 속에 슬쩍 진지한 호감을 담아 전해왔을 때에도 나는 잔뜩 굳어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전혀 아니다. 다만 어찌해야 될지를 몰랐을 뿐이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작업실은 너무 환했고, 우리는 타인들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괴로워지자 그녀가 말문을 돌렸다. 와인 좋아하시나 봐요? 셰리는 책꽂이에 눕혀져 있는 와인병들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네, 조금,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셰리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한 잔 따라주시면 안되요? 마침 여기 따놓으신 게 있네. 그때 그녀가 집어든 와인이 곤잘레스 비아스(Gonzalez Byass)였다. 스페인산 셰리(sherry)다.
너무 달 텐데요. 그깟 와인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다만 그 어색한 만남을 견뎌내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요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해요, 한 잔 따라주세요. 내가 셰리를 엄지손톱만큼 따르자 그녀는 예쁘게 눈을 흘겼다. 에게? 너무 아끼신다. 나는 한 모금이면 족한 강화와인(fortified wine)이라고 덧붙이려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잔을 채워줬다. 한 모금을 맛본 그녀는 뜻밖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찬탄을 표시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 이후로는 괴로운 희극 혹은 우스꽝스러운 비극의 연속이다. 그녀는 셰리를 커다란 와인잔으로 무려 다섯 잔이나 마신 것이다. 어색한 침묵, 과장된 찬탄, 그리고 결국은 그녀 홀로 비워버린 달디 단 셰리 반 병. 그것은 와인과 관련하여 내가 목격한 가장 그로테스크하고 참아내기 힘들었던 장면이었다.
[img3]셰리 반 병을 다 비워 더는 마주 앉아 있을 어떤 핑계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불콰해진 얼굴에 당장 울듯한 표정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잘 마셨어요. 구두를 신을 때 셰리는 약간 비틀거렸다. 생각보다 달고, 생각보다 취하네요. 황망히 사라지려는 그녀에게 나는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셰리에 대한 일반 상식을 덧붙였을 뿐이다. 알콜 도수가 높아요, 한 모금만 드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셰리는 피식 웃으며 체념한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모든 와인맛이 다 이런 건 아니겠죠? 나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지려는 표정들을 애써 감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이건 아주 특수한 와인이에요. 언젠가 당신 맘에 쏙 드는 와인을 찾게 되실 거에요. 셰리는 비틀대지 않으려 애를 쓰며, 뒤돌아보지 않은채 손을 흔들며, 오피스텔의 긴 복도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게 내가 본 셰리의 마지막 뒷모습이다.
헬로 셰리, 그때는 정말 당황했었고, 정말 미안했어요.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우리도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너무 급작스럽게 만났고 해괴한 방식으로 헤어졌군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왜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지를 깨달았어요. 당신이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에요. 어쩌면 무척이나 취했던 그날밤 내게 알려줬는지도 모르죠. 이따금씩 셰리를 마실 때마다 당신의 괴로웠던 다섯 잔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집니다. 내가 이 말도 했던가요? 당신은 멋진 여자에요. 다만 인연이 어긋났던 것뿐이죠. 지금쯤은 당신도 멋진 와인의 추억을 여럿 가지고 있으리라 믿어요. 만약 또 셰리를 마시게 된다면, 명심하세요, 그건 한 모금이면 족하답니다.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3월 5일
와인의 종류 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필자의 연애 편력 혹은 상상력......
그저 찬탄으로 바라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