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애인연합의 절묘한 블렌딩
심산의 와인예찬(16) 프랑스 론 남부의 샤토뇌프-뒤-파프(하)
사람들은 특정한 해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어떤 이는 1988년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라고 기억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그 해를 ‘죽 쒀서 개 준 해’라고 떠올릴 것이다. 유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전리품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이없게도 노태우가 당선되어 집권한 해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가 취임한 것은 1987년 연말이었던가? 벌써 20년 가까이나 과거로 밀려난 해이고 보니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1988년은 아주 선명하다. 나는 그 해를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애인 없이 생일을 맞은 해’였다고 기억한다.
꿀꿀한 생일을 코 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형 며칠 전에 세브란스에 실려 갔었다면서? 깔깔대는 웃음소리 밑에 연민을 감추고 그렇게 내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그르나슈(Grenache)였다. 낼 모레가 형 생일인데 만날 사람도 없겠네? 나랑 점심 먹을래?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러운 투정을 부렸다. 너 지금 나 약 올릴라 그러는 거지? 그르나슈는 여전히 예의 그 하이톤의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제멋대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애인 없다고 저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 찡찡대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나와! 하지만 정작 생일날 아침이 되자 그녀는 약속을 번복했다. 12시 말고 11시, 그 한정식집 말고 고 옆의 커피숍에서 만나.
그르나슈는 이십대 중반의 한 세월을 함께 보냈던 애인이다. 외모는 전형적인 톰보이 스타일인데 성격마저 그러하여 흡사 남동생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한때 애인이었다가 이후 친구로 남을 수도 있는가? 내겐 그런 친구들이 많다. 그르나슈 역시 그런 친구다. 내가 뭐랬어? 루싼느(Rousanne), 걔는 첨부터 형이랑 안 맞았다구, 어쩜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없을까? 나는 커피 리필을 시키며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너 지금 그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야? 아침부터 자는 사람 불러내갖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그르나슈는 그러나 대뜸 제멋대로 내 말끝을 잘라먹는다. 나도 바쁘거든? 형 만날려고 회사에다가 거짓말 하고 나온 거거든? 그러니까 고마운 줄이나 아셔.
[img2]사실은 고마웠다. 그래서 한정식집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마주 앉으면 볼멘소리로나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정식집 앞까지 가서는 팩 돌아서며 내 어깨를 떠미는 것이었다. 꼭 점심 같이 먹고 싶었는데 나는 회사로 돌아가야 돼. 어이가 없었다. 야, 너, 지금 정말...그럼 나 혼자 밥 먹으라고? 그르나슈는 귀엽고도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활짝 웃었다. 형 혼자 밥 먹는 거 무지 싫어하는 거 나도 잘 알아.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일단 들어가 보라니깐? 그녀는 내 뺨에 살짝 키스를 해주고는 막무가내로 내 등을 떠다밀었다. 생일 축하해, 힘 내고, 건강하고, 밥 잘 먹고!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한 내가 한정식집 현관에서 다시 나오려 할 때 등 뒤에서 무르베드르(Mourvedre)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여기, 나 여기 있어!
정갈한 한정식집의 작은 독방에 무르베드르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헛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그르나슈가 연락한 거니? 무르베드르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 언니를 누가 말리겠어? 전채요리를 내 접시 위로 놓아주고 있는 무르베드르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르나슈보다 일 년쯤 전에 만나던 친구인데 당시에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어쩐지...이 집에서 점심 먹자고 했을 때 내가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무르베드르는 어이 없다는듯 도리질을 하면서도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기 이제 내 단골집도 아니고, 오빠하고 나만의 단골집도 아니야. 나 가끔씩 그르나슈 언니하고도 여기서 만나서 밥 먹고 그래. 언니가 저번에 프랑스 갔다올 때 내 논문 자료들도 이 만큼 챙겨줬어.
무르베드르는 더 이상 철부지 여대생이 아니었다. 허랑방탕한 애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세상을 무작정 증오하던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나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던 새 애인하고는 지금도 매주 함께 성당에 다닌다고 했다. 확정된 논문의 청사진을 그려 보일 때는 젊은 소장학자로서의 포부와 가능성이 내 눈을 부시게 했다. 나랑 헤어진 다음에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된 거 같구나. 무르베드르는 수줍게 웃으면서도 부드럽게 나를 타박했다. 오빠도 이제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나는 멋쩍게 꼬랑지를 내렸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잘 못 했던 거, 이제는 다 잊어버렸니? 그녀는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홀짝거리며 피식 웃었다. 잊지는 못하지, 하지만 용서는 해줄게.
한정식집 앞에서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새로운 약속장소를 알려줬다. 인사동의 그 찻집 알지? 여기서 택시타면 십오분 안에 갈 거야. 이제는 감을 잡았다. 찻집 이름만 듣고도 그곳에 누가 나와 있을지 빤했던 것이다. 맙소사, 비오니에(Viognier)하고도 약속을 잡아놓은 거야? 넌 비오니에 아주 질색했잖아. 무르베드르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육교를 올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옛날 얘기야, 걔도 알고 보니 참 근사한 얘였더라구. 만나면 손 한번 잡아봐, 요즘 도예에 빠져서 손에 각이 제대로 잡혔어. 비오니에는 그르나슈와 헤어진 다음 만났던 친구다. 도예가 남편을 만나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익히 듣고 있었다. 그 남편은 내게 자기가 만든 근사한 재떨이를 하나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비오니에는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결혼이나 빨리 하라고 윽박질렀다. 애를 낳아봐, 인생의 완전히 다른 차원이 열려. 언젠가 네가 왜 살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 애가 그걸 가르쳐 줄 거야, 이제 허튼 짓들 좀 그만 하고 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구. 그녀는 두툼하게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얼마 전에 또 실연 당했다면서?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말이 아니네...내가 좋은 차(茶) 가져 왔거든? 집에 가져가서 아침 저녁으로 꼭 마셔, 맨날 술만 퍼먹지 말고 쫌. 그날은 하루 종일 그런 식이었다. 1988년의 내 생일, 나는 현직 애인을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자기들끼리 연락을 취하여 서로 번갈아가며 나를 만나준 전직 애인들을 여럿 만났다.
그 중의 제일 압권은 맨 마지막에 만난 쌩쏘(Cinsault)였다. 십대 후반의 한 시절을 나와 함께 보냈던 그녀는 일찌감치 결혼하여 아이를 두 명이나 낳았는데, 마땅히 그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둘 다 데리고 나온 것이다. 사내아이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상태였고 딸아이는 아직 유치원에도 가지 못한 꼬마였다. 나는 쌩쏘와 함께 그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랜드로 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깔깔댔고 청룡열차를 타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해가 뉘엿뉘엿 해져서 우리들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길게 누울 즈음이었다. 야릇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쌌다. 나도 누군가와 결혼하여 이렇게 아이들을 낳고 그들과 함께 청룡열차를 타러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게 피어올랐다.
[img3]훗날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해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전직애인연합이다. 내가 작가가 되고 돈도 제법 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대견(?)하게 여겨준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애증이 마구 뒤섞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사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생각해볼 걸 그랬네. 너 예전에 맨날 나한테 용돈 뜯어갔지? 이제 나 볼 때마다 맛있는 거 사줘야 해! 그들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쌩쏘의 아들이 대학입시를 치룰 때 가장 믿을만한 상담자는 바로 나였다. 프랑스에 있는 그르나슈의 딸에게 한글로 된 팝업북을 선물해준 것도 나였다. 내 딸에게 리틀타익스 자전거를 물려준 것은 무르베드르였고, 심산스쿨을 열었을 때 도착한 멋진 화분을 직접 만들어준 것은 비오니에였다.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까리냥, 쌩쏘, 마르싼느, 루싼느, 비오니에, 클레레트...그들 각자는 모두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 몸을 섞으면 그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작품이 하나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샤토뇌프-뒤-파프이다. 1988년의 그날처럼 전직애인연합의 멤버들을 모두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축복 받은 날이 내 삶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날 마시게 될 와인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다양한 개성들이 조화롭게 몸을 섞고 있는 프랑스 론 남부의 걸작, 샤토뇌프-뒤-파프이다.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6월 11일
우와~ 그냥 감탄사 밖에 안나옵니다 . 2주 기다린 보람이 팍팍!! 나이수 ~
문득 저의 88년을 회상해 봤어요 ... 전 이런 고민을 했었죠 .. 그 당시 ..
어떻게 하면 ' 전우의 시체 ' 정수리 단계를 마스타 할 수 있을까 .. ( 고무줄이요 .. )
방법은 키작은 친구가 고무줄을 잡기를 바라는 수 밖에는 ..
물리적으로 반에서 젤로 키작은 제가 딱히 뾰족한 수를 쓰기는 힘들었죠 ..
혹시 ' 나이키 에어'를 신고 뛰었담 가능했을라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