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가 사랑한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18) 샤토 마고 1848
요즘 세대들에게는 마치 백악기나 주라기 따위 아마득한 선사시대의 유물처럼 들리겠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한 때 전세계를 제패했었다. 아니다. 어쩌면 위의 문장에서 ‘한 때’라는 시한적 수식어는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요즘처럼 팩스 아메리카나 혹은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웬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다는 말은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탄생하고 성장했으되 결코 죽지 않는 인류의 이상이다. 적어도 박물관 진열대 위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채 방치되어도 좋을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창립자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아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이다. 철학자 겸 혁명가로 불리워야 마땅할 이 두 사람은 흡사 버디무비의 주인공들 같다. 이를테면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델마와 루이스]의 델마와 루이스, [태양은 없다]의 도철과 홍기 같다는 말이다. 버디무비의 경우 보다 더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인물의 이름을 앞에 쓰고, 이들을 제1주인공으로 여기는 것이 일종의 관례이다. 즉 잔머리 대마왕 부치(폴 뉴먼)와 순진과격녀 델마(지나 데이비스)가 제1주인공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든 관객이 제1주인공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객들은 다소 어벙해 보이지만 총솜씨만은 끝내주는 선댄스(로버트 레드포드)나 단호해 보이지만 상처를 안고 사는 루이스(수잔 서랜든), 혹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날라리 홍기(이정재)를 더욱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나는 이 영화들의 제2주인공을 더 사랑한다. 이 마이너적 취향에도 일종의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는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케이스에서도 결론은 동일하다. 마르크스주의에 열광했던 청년시절에도 내가 사랑한 캐릭터는 엥겔스였지 마르크스는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얼굴 마담이라면 엥겔스는 막후의 후원자이다. 마르크스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면 엥겔스는 수석 바이올린 주자이다. 막후의 후원자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얼굴 마담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수석 바이올린 주자가 눈을 맞춰주지 않으면 지휘자의 지휘봉이란 한낱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어쩌면 그들의 타고난 캐릭터 자체에서 연유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집요한 대신 자폐적이고 외골수적인 성향이었던 데 반해 엥겔스는 대범하고 호탕했으며 자유분방한 캐릭터였다. 전자가 마르크스주의의 얼굴 마담이었다면 후자는 그것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img2]두 사람이 저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공동 집필하여 만천하에 발표한 것은 1848년이다. 이후 세상을 뒤흔든 저 선언이 당시 고작해야 30살과 28살의 혈기방장한 청년들에 의하여 쓰여 졌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아이러니컬하다. 1848년은 그들 생애 최고의 해였다. 단지 [공산당선언]을 발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848년 2월의 파리혁명을 도화선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프러시아 등 유럽전역에서 성난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제히 떨쳐 일어섰던 것이다. 혁명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혁명지도세력의 부재와 보수세력의 와해공작 및 탄압으로 제대로 꽃 피워보지도 못한채 사그러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폐와 곤궁의 세월을 살아간다. 당시 그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집필활동을 독려해준 것은 물론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불후의 명작 [자본론]을 제1권만 출간한 다음 죽었다. 마르크스가 임종할 때 그의 곁에서 최후를 지켜봐준 사람 또한 엥겔스였다. 그가 못 다 이룬 과업을 이어받아 자신이 직접 가필하고 편집하여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을 세상에 내어놓은 사람 역시 엥겔스였다. 이쯤 되면 ‘필생의 동반자’라고 할만하다. 엥겔스가 없는 마르크스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독일에서 출간된 [은밀한 사전]은 역사적 인물들의 성적 사생활을 집대성해놓은 해괴한 책이다. 마르크스 역시 이 책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배꼽을 잡게 만든다. 원래 기차길 옆 오막살이에 사는 가난한 집안에 아이들이 많다던가? 마르크스 부부 역시 아이들을 7명이나 낳았다. 그의 장모가 보다 못해 가정부를 보내줬다. 외골수의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 간 자신의 딸이 너무도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가정부마저 임신을 시켜버렸다. 자 이제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제발 자네가 그녀를 임신시켰다고 해주게.” 엥겔스의 답장은 호탕했다. “자네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게.”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던 마르크스의 아내는 엥겔스를 지독히도 경멸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엥겔스는 고작해야 ‘친구집 가정부를 임신시키는’ 파렴치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엥겔스는 그렇다면 평생토록 마르크스에게 ‘당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말년의 마르크스에게 역공(!)을 펼쳤다. 마르크스의 딸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것이다. 마르크스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데이트를 그만 두라고 윽박질렀지만 엥겔스의 답신은 한 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나는 엥겔스의 그 편지를 사랑한다. “자네 아직도 그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을 쓰고 있나? 5월에는 파리로 오게. 파리의 5월은 너무 아름다워. 멋진 아가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근사한 와인들이 도처에 넘쳐난다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딸이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다정히 손을 잡고 파리의 퐁텐블로 숲에서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은 많이 남아있다.
[img3]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와인에 대한 엥겔스의 문답이다. 누군가 엥겔스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마르크스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 혹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 그게 마르크스다. 하지만 엥겔스는 달랐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샤토 마고(Chateau Margaux) 1848." 샤토 마고에 대해서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와인의 빈티지이다. 1848년! 아아, 얼마나 아름다운 한 해였던가? 엥겔스 인생 최고의 해였고, 유럽 전역이 혁명으로 들끓어 오르던 해였으며, 샤토 마고가 최고의 빈티지를 기록한 해였다.
엥겔스는 부르조아계급을 증오했다. 샤토 마고는 부르조아계급의 와인이다. 그런데 엥겔스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내 인생의 행복은 샤토 마고 1848년입니다.” 이것이 모순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모순이라 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모순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엥겔스를 나는 사랑한다. 언젠가 내가 속해 있는 와인동호회에서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죽기 전에 꼭 마셔보고 싶은 와인은? 내가 샤토 마고 1848이라고 답하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글은 그 답변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쓰여지고 있는 셈이다. 내게 있어 샤토 마고 1848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엥겔스적 삶의 태도에 대한 지지이고,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젊은 마르크스주의가 세상을 뒤흔들었던 ‘좋았던 옛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와인’에 대한 짝사랑의 연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며칠 전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최근 누군가가 샤토 마고의 저장고에서 1848년 빈티지의 와인이 멀쩡히 보관되어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오, 마이 갓!”이다. 세상에, 샤토 마고 1848이 아직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니! 아마도 가난한 작가인 내가 그 와인을 맛볼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운 그 무언가가 어딘가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느낌. 그것이 엥겔스의 행복인지,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인지, 샤토 마고의 전설적인 빈티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7월 9일
샤또 마고와 함께 있는 엥겔스의 표정이 너무 근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