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이런 와인 어때요?
와인 입문자를 위한 팁
심산/심산스쿨 대표(www.simsanschool.com)
모든 것은 제 자리에 놓여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야생화는 들판에 피어 있어야 아름답고, 만년설은 산꼭대기를 덮고 있어야 어울리는 것이다. 억지로 꺾어와 화병에 꽂아놓은 야생화는 금세 시들며, 스키장 슬로프에 뿌려댄 인공눈은 옷을 축축하게 만들 뿐이다. 와인 역시 그렇다. 모든 와인에는 그에 걸맞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남의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샴페인을 딴다면 그것은 잔혹한 코미디이고, 야외 바베큐 파티에 내놓은 프랑스 그랑크뤼 와인은 허장성세의 극치일 뿐이다.
이제 막 와인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늘어놓는 고정 레파토리가 있다. 와인은 다 그게 그거 같고, 도저히 외울 수가 없으며,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와인은 모두 저마다 다르다. 그 무한한 지평과 끝 모를 깊이가 바로 와인의 매력이다. 무언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기준점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와인이 비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한다. 비싼 와인은 비싸다. 그러나 싼 와인은 싸다. 그리고 비싼 와인이 언제나 당신을 만족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img2]입문자가 모든 와인의 맛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고, 그 이름들을 줄줄이 외우며, 값비싼 와인들을 마구 마셔댄다면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기준점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것을 기점으로 자신의 영토를 서서히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이 와인 저 와인 마셔보다 보면 어느 순간 필이 팍 꽂히는 와인(!)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 와인을 편의상 ‘기준와인’이라 부르자. 영어식 표현으로는 ‘데일리 와인(daily wine)'이다. 당신이 선택한 기준와인이 너무 비싼 것이 아니길 바란다. 왜냐하면 앞으로 당신은 그 와인을 그야말로 매일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와인에 본격 입문할 즈음의 기준와인은 무똥 까데(Mouton Cadet)였다.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의 데일리 와인이었고, 그녀가 칸느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그 영화제의 공식 와인으로 채택되어 더욱 유명해진 와인이며, 저 유명한 샤또 무똥로쉴드의 기술력과 명예가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는 와인이다. 이쯤 되면 엄청나게 비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국내 소매가 2만원대의 저가 와인이다. 자 이제 기준와인을 정하고, 그 와인의 향미(flavor)에 익숙해졌다면, 다른 와인들과의 비교 시음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 이 와인은 무똥 까데보다 좀 달착지근하군. 이 와인은 무똥 까데보다 훨씬 더 묵직한 느낌이 나는데? 이런 식이다. 와인이라는 저 광대무비한 우주는 그런 식으로 당신에게 길을 내주게 된다.
입문자에게 나는 언제나 화이트 와인을 먼저 권한다. 우리나라의 와인소비 패턴은 대단히 기형적이다. 지나치게 레드 와인에만 경도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와인이란, 마치 김치가 그러하듯, 발효식품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김치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맛은 어쩌면 ‘묵은 김치’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김치의 세계에 처음 접하는 외국인이라면 사정은 조금 복잡해진다. 어쩌면 그 냄새만 맡아도 욕지기부터 해댈지 모른다. 외국인에게 처음 대접하는 김치로는 백김치나 동치미 같은 것이 좋다. 담백하고 부담이 없어 접근하기가 용이한 것이다. 백김치나 동치미에 해당하는 와인이 바로 화이트 와인이다. 레드 와인에 비하여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
[img3]요즘처럼 야외로 소풍가기에 좋은 날들에는 화이트 와인이 제격이다. 공원의 풀밭에 자리를 깔고 혹은 계곡물 속에 두 발을 담그고 간단한 샐러드에 곁들여 즐기는 화이트 와인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만약 당신이 달착지근한 맛을 선호한다면 독일 중저가 화이트 와인의 베스트셀러 립프라우밀히(Liebfraumilch)를 권한다. 립프라우밀히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브랜드가 블루넌(Blue Nun)이다. 드라이한 맛을 좋아하는 나는 이탈리아의 소아베 클라시코(Soave Classico)를 즐겨 마신다. 횟집의 반주로는 프랑스의 샤블리(Chablis)가 잘 어울린다. 샤블리란 샤블리 지방에서 샤르도네(Chardonnay) 100%로 만든 화이트 와인인데, 특유의 찝찔한 맛이 해산물 종류와 더 없는 궁합을 이룬다.
무언가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면 역시 스파클링 와인이 좋다. 프랑스 샴페인 지방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스페인에서 만든 까바(Cava)나 이탈리아에서 만든 스푸만테(Spumante)를 추천한다. 최근에는 스페인 까바의 대표적인 제조업체 프레이세넷(Freixenet)이 만든 1/4 용량(20cl)의 스파클링 와인이 국내 편의점에 등장했는데 모양마저 더 없이 깜찍하고 귀엽다. 연인들끼리 만난 지 100일 되는 날을 기념한다거나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줄 때 깔끔하고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다. 스파클링 와인은 탄산가스가 코르크를 밀어낼 때 내는 경쾌한 개봉음과 끝없이 솟구쳐 오르는 맑은 기포의 향연이 마시는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img4]야외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다거나 고기집에서 돼지갈비 따위를 구울 때라면 묵직한 칠레 와인이 좋다. 칠레를 비롯한 신세계 와인들은 대개 알콜농도가 높고 스파이시(spicy)한 맛을 내서 양념을 많이 쓰는 우리나라 음식에 잘 어울린다. 평소에 칠레 와인이라고 하면 지레 손사래부터 쳐대는 나도 야영장에서 고기를 구워먹을 때는 벌컥 벌컥 잘도 마신다. 여럿이 야외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와인을 마실 때면 호주에서 만든 캐스크 와인(Cask Wine)도 좋다. 캐스크 와인이란 백-인-박스(Bag-in-Box) 와인이라고도 하는데, 사각형의 종이상자 안에 비닐봉지를 넣고 그 안에 와인을 담아 일종의 수도꼭지 같은 것을 통하여 따라 마시도록 되어 있는 와인이다. 전통적인 와인애호가들이라면 그 천박함(!)에 질겁을 하겠지만 운반 도중 깨질 염려도 없고 무엇보다 용량이 커서 여럿이 함께 즐기기에는 그만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프랑스 그랑크뤼로 대표되는 고급 와인들은? 입문자들은 멀리 하는 게 좋다. 물론 최고의 와인이지만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게다가 가격은 좀 비싼가? 한 마디로 악(!) 소리가 난다. 백보 양보해서 만약 당신이 프랑스 1등급 샤또, 가령 샤또 라뚜르(Chateau Latour)를 음미하고 대번에 그 맛에 반해버렸다고 하자.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이다. 자신의 첫차로 람보르기니를 탄 사람은 그 이후 벤츠도 탈 수 없고 소나타도 탈 수 없고 티코도 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매일 매일 마셔댄다 해도 평생 다 맛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과 질의 와인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일단 당신의 기준와인부터 정해라. 그 다음에 한 발자국씩 혹은 반발자국씩 자신의 영토를 넓혀가는 것이다. 이런 날엔 이런 와인을, 저런 날엔 저런 와인을. 그 과정을 즐겨라. 와인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다.
월간 [인터뷰] 창간호 2007년 9월호
아예 작정하고 내 멋대로 단행본을 쓰는 게 낫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