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과 정착 사이의 짧은 휴식
심산의 와인예찬(21) 남부 티롤의 상트 발렌틴
엊그제 한 텔레비전 공중파 방송국의 녹화방송에 참여하고 왔다. 이따금 축구경기 하이라이트나 기웃거릴 뿐 텔레비전하고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온 지가 너무도 오래 되어서 처음 출연 섭외를 받았을 때는 약간 당황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제목을 듣자 대상 모를 경계심은 단박에 무장해제되었다. 수년 전 나의 졸저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한 권을 가지고 장장 1시간 동안이나 토론을 벌여주었던 책 소개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 방송에서 토론의 대상으로 선정된 책 이야기를 전해 듣자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라인홀트 메스너(Rheinhold Messner, 1944- )의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였던 것이다.
메스너에 대해서라면 나는 한 일주일 동안은 떠들어댈 자신이 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우상이었고, 나는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의 열혈독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라인홀트 메스너를 ‘인류 최초로 8천미터 이상의 산 14개를 모두 오른 산악인’이라고 기억한다.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의하면 메스너의 진가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는 육체와 정신 양 영역 모두에서 ‘인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온 사람’이다.
만약 메스너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는 단지 육체적인 괴력의 소유자 정도로 폄하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스너는 끊임없이 글을 썼다. 수년 전 독일어권 인터넷 서점을 방문해보았더니 ‘라인홀트 메스너 50번째 저서 출간 기념 이벤트’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일단 양적으로만 따져도 웬만한 전업작가들은 흉내내기조차 힘든 규모이다. 질적으로는 더욱 놀랍다. 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인간의 한계 저편’을 더 없이 핍진한 문체로 상세히 묘사하고 진중한 철학적 성찰을 펼쳐놓는데, 그 수준이 웬만한 철학서나 종교서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너무 작다. 사실 1986년에 그가 8천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르고 살아서 내려왔을 때 나는 엉뚱한 걱정(?)에 휩싸였다. 그때 메스너의 나이가 고작 42살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만 되는 것일까? 하지만 메스너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 대상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돌파해왔다. 그는 홀로 남극을 횡단했다. 히말라야 원주민들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설인(雪人) 예티(Yeti)를 찾겠다며 ‘지도의 공백지대’라고 불리우는 티벳 동쪽의 무인지대를 홀로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2004년, 이제 60세가 된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자신의 ‘마지막 모험’을 위하여 길을 나선다. 장장 2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구 최대 규모의 고비사막을 저 홀로 걸어서 횡단하는 것이다.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는 이 황당한 모험의 기록이다.
내가 제 아무리 메스너의 열혈 신도라고는 하나 그에 대하여 박사학위 논문이나 장편소설 따위를 쓸 생각은 없다. 이야기가 더 크고 길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갈피를 잡아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많이 웃었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메스너는 ‘부담스러운 인간’이었다. 지난 수십년간 펼쳐 보인 그의 행동과 사색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거의 ‘초인’의 경지에 이르른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독일어 문장은 지나치게 진중하고 무거워서 숨통이 막힐 지경이다. 그는 때때로 노골적일만큼 안하무인격의 태도를 취하기도 했고 오만방자한 성품을 드러내기도 했다.
[img2]하지만 천하의 메스너도 세월을 거슬러 살 수는 없다. 그 역시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처럼 늙어가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늙고 연약한 메스너’를 여러 번 만날 수 있다. 끝끝내 혼자 걷겠다는 결심도 결심뿐이다. 그는 지평선 저 멀리 트럭이라도 나타나면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려가며 소리소리 지른다. “사람 살려! 나 좀 태워줘!” 유목민 텐트를 만나면 염치 불구하고 음식을 구걸한다. 알타이 산맥을 넘을 때는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육체를 내려다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쓴다. “예전에 내가 올랐던 모든 산들의 높이 따위는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나는 이제 늙은 등반가일 뿐이야. 그걸 인정해야만 돼.”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늙은 메스너를 조롱하거나 폄하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그는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는 유럽의회 의원직을 내팽개치고 나이 육십에 사막을 홀로 건넌다. 왜? “제대로 늙어가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이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 죽음의 세계를 체험해보고 싶어서이다. 대자연의 위대함과 나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해보고 싶어서이다.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인가? 기껏해야 자식들이 마련해준 비행기 티켓으로 남태평양 어디쯤의 한가로운 휴양지 메드클럽에 가서 럭셔리한 유리잔에 담긴 열대과일주스를 쪽쪽 빨아먹고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메스너는 심지어 이렇게 ‘망가지는 여행’을 통해서도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나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든 것은 그의 냉정한 독백이다. “고비 사막을 횡단한 결과 나는 더욱 노련해지고 현명해졌는가? 아니다. 단지 더 늙게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그렇다. 행복하다. 단지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메스너는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는 정신분열증이 있다. 문명세계에 있으면 탈출의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이런 황무지를 찾는다. 하지만 황무지에 오면 곧바로 문명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일종의 정신분열이다. 그것은 지난 수천년 동안 유목민과 정착민들 사이에서 벌어져온 생활방식 혹은 투쟁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렇다. 내 안에 사막이 있다. 그곳에서는 방랑의 욕망과 정착의 욕망이 투쟁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메스너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이 아니다. 여권에 기재되어 있는 국적은 이태리이지만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티롤 사람’이라고 말한다. 옛 티롤왕국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북부 티롤은 오스트리아에, 남부 티롤은 이태리에 병합되어 버린 것이다. 메스너는 남부 티롤에서 태어났고 현재에도 그곳에서 산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태리 북부의 알토 아디제(Alto Adige)에 속하는 곳이다. 메스너는 이곳의 빈쉬가우와 슈날스탈 사이 암석지대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고성(古城)에서 살고 있다. 노란색의 르네상스식 담장과 황갈색 지붕을 갖춘 이 주발 성(城) 아래로는 와인양조용 포도농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언젠가 주발 성의 자기 서재에 앉아 있는 메스너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깊게 패인 주름살이 인상적인 이 노년의 등반가는 두툼한 고서(古書)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붉은 와인 한 잔이다. 그 와인 한 잔이 내게는 방랑과 정착 사이의 짧은 휴식처럼 보였다. 방랑도 고통스럽고 정착도 고통스러울 때 그 완충지대에서 잠시나마 꿈결 같은 휴식을 제공하는 한 잔의 붉은 와인. 메스너가 마시던 그 와인이 정확히 어떤 것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성이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보아 알토 아디제의 블라우부르군더(Blauburgunder)로 만든 레드 와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알프스 주변 독일어권의 일부 지역에서 블라우부르군더라고 부르는 이 품종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태리 일부 지역에서는 피노 네로(Pinot Nero)라고도 부르는 이 품종은 바로 프랑스 부르곤이 원산지인 피노 누아(Pinot Noir)이다. 남부 티롤 지방에서 피노 누아로 만든 가장 유명한 와인이 상트 발렌틴(Sanct Valentin)이다. 그윽한 향기와 고상하고 기품 있는 뒷맛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실제로 라인홀트 메스너가 상트 발렌틴을 즐겨 마시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상트 발렌틴을 마실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는 것뿐이다. 오늘밤에는 상트 발렌틴을 홀짝거리며 메스너와 그가 횡단한 사막을, 혹은 방랑과 정착 사이의 짧은 휴식을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다.
[img3]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8월 20일
글이라는 소통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원생동물이 머리 쥐어짜니까 물밖에 안나오네...==;;)
그나저나 [사이에 홀짝이는 와인]... 와인이 그런거였군요. 와인에 대한 묘사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네요.^^
언제 티비에 나오시는지 갈켜 주세요. 아! 재밌겠당.^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