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8-31 01:07:06 IP ADRESS: *.131.1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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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붉으면 어떠리 희면 어떠리
심산의 와인예찬(22) 그르나슈 누아 에 블랑

내가 세상에 발표한 첫 번째 장편소설은 [하이힐을 신은 남자]였다. 세상과 개인사의 폭력에 의해 게이로 변해버린 한 사내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제 와 뒤적여 보면 그것을 작품이라고 부르기조차 낯 뜨겁다. 그만큼 형편없다. 단 하나의 돋보이는 장점을 찾아낸다면 그나마 ‘새로운 형식 실험’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작품에는 소설적 서술방식과 영화적 서술방식이 의도적으로 마구 뒤섞여 있다. 마치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 와인예찬이 소설과 에세이를 구분해낼 수 없도록 마구 뒤섞어 놓은 것처럼.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하이힐을 신은 남자]는 애당초 시나리오로 쓰여진 작품이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자신만만하게 들이밀었던 이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온갖 제작사들로부터 연달아 퇴짜를 맞자 분한 마음에 혹은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것을 장편소설로 ‘각색’한 것이다. 이 지면이 소설과 영화의 장르적 차별성 혹은 작가로서의 나의 무능력을 논하는 자리는 아니니 서론은 이쯤에서 접어두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하이힐을 신은 남자]의 취재과정에서 만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그르나슈(Grenache)라고 해두자.

게이? 게이는 왜? 너 그새 성적 취향이 바뀌었냐? 내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이를 한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하자 이태원 밤무대 DJ로 날리고 있던 친구 녀석이 낄낄대며 되돌려준 질문이다. 녀석의 자칭 별명이 ‘이태원 보안관’이다. 그 정도의 부탁쯤이야 이빨을 쑤시면서도 해결할 수 있다. 다음 날 우리 세 사람은 이태원의 한 근사한 바에서 만났다. 하지만 처음에 나는 그르나슈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자식이 제 애인을 데리고 나와서 나한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는군. 양주를 반 병쯤 비웠을 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본론을 들이댔다. 그런데...내가 어제 부탁했던 친구는 왜 안 데리고 나왔어? 녀석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얘가 걔야!

솔직히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 앞에, 정확히 내 앞에 앉아있던 친구 녀석의 옆에, 그러니까 나와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던 그녀(!)가 게이라구? 녀석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판단할 수가 없어 내 표정이 야릇하게 굳어져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르나슈는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할끔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갑자기 시선 둘 곳을 잃어버렸다. 방긋한 가슴, 잘록한 허리, 곱게 뻗은 종아리...그런데 이 친구가...남자라구? 처음 만나는 사이에 분명히 그것은 실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르나슈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그녀를 훑어볼 때의 내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던 것도 같다.

[img2]

짖꿎은 내 친구 녀석이 설레발을 치며 끼어들었다. 너 얘한테 뿅 갔지? 어때, 웬만한 기집애들보다 훨 낫지?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르나슈가 예쁘게 눈을 흘기며 내 친구 녀석을 얄밉다는듯 툭 때리는 그 동작을 보자 더욱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가, 아니 이 사람이...정말 남자란 말인가? 양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갈 때쯤 녀석은 기어코 사고를 쳤다. 얌마, 침 닦고 정신 좀 차려! 얘, 좆 달린 놈이야, 볼래? 녀석이 그르나슈의 예쁜 치마를 훌러덩 까뒤집었다. 그르나슈는 꺄악 소리를 내며 그 손을 제지하고는 엉엉 소리 내어 울더니 결국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쳐 버렸다. 나는 그 다음에도 한참 동안이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멍하니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해 여름과 가을을 나는 그르나슈와 함께 보냈다. 언표된 목적은 분명했다. 게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편영화 시나리오의 취재를 위해서. 하지만 당시에도 나는 그것이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보란듯이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새벽빛이 희뿌윰하게 떠오를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는 그르나슈를 ‘만나고 싶어서’ 만났을 뿐이다. 거리를 쏘다닐 때면 마주치는 모든 청춘남녀들이 우리에게 시새움의 눈빛을 보낸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여자들은 그르나슈의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질투했고, 남자들은 그렇게 멋진 여자를 애인(?)으로 둔 나를 질투했던 것이다.

내게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울라치면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르나슈는 취재원일 뿐이다. 그리고 취재는 이제 충분하다. 내일 만나면 그 동안 고마웠다고, 더 이상은 만나지 말자고 말해야지. 하지만 다음날 막상 그르나슈와 마주치게 되면 어젯밤의 맹세 같은 것은 뙤약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저절로 녹아버린다. 도저히 그/그녀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르나슈는 예뻤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였다. 억지로라도 술에 잔뜩 취한 어느날 밤 나는 그르나슈와 잠자리를 함께 할뻔 했다. 육체적인 사랑의 관계말이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굳이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침대 저편의 한 귀퉁이에 앉아 등을 돌리고 몸을 잔뜩 웅크린채 그르나슈가 운다. 나도 내가 싫어요. 내 몸에 왜 이렇게 흉측한 것이 달려 있는지 나 자신도 너무나 끔찍하다구요. 하지만 나는 여자에요! 당신도 그걸 알잖아요? 나는 그르나슈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으나 그/그녀는 내 손을 사납게 뿌리친다. 그르나슈는 흉하게 번진 눈화장 너머로 표독스럽고도 애절한 눈빛을 쏘아붙이며 나를 다그친다. 당신을 사랑해. 당신도 나를 사랑하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뭐가 더 필요해! 나는 비겁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될지 알지 못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그/그녀의 논리에 무어라고 반박해야 될지를 알 수가 없었다.

[img3]

그르나슈와 헤어지는 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그/그녀는 우리가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다음에도 거의 일 년 가까이나 내 주위를 맴돌았다. 노골적인 스토킹을 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나 그/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다. 받으면 끊어져 버리곤 하던 전화와 발신인 없는 편지와 선물 그리고 손수 뜬 레이스에 포장된 채 집 앞에 오두마니 남겨져 있던 어여쁜 화분들. 그르나슈는 얼마 후 일본으로 떠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그녀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엊그제 한 와인숍에서 전혀 뜻밖의 와인을 발견하고는 불현듯 그/그녀를 떠올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르나슈(Grenache)를 레드와인 양조용 포도품종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스페인이 원산지인 이 품종은 프랑스의 론 남부와 프로방스 그리고 랑그독-뤼시옹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는데, 저 유명한 샤또뇌프-뒤-파프의 메인 품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르나슈로는 화이트와인도 만든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르나슈는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를 뜻한다. 이것과는 별개로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이라는 것도 있다. 내게 불현듯 그 예뻤던 그르나슈를 떠올리게 한 것은 바로 이 그르나슈 블랑으로 만든 뱅 드 뻬이(Vin de Pays)급 화이트와인 포르튀나트(Fortunate)였다.

그르나슈 블랑을 마시면서 생각한다. 왜 우리는 그르나슈로 만든 와인이면 모두 다 레드와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더 나아가, 레드와인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다가 그것이 화이트와인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왜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는가? 예상치 못했던 화이트와인을 마시면서 그르나슈를 생각한다. 헬로 그르나슈, 잘 지내고 있어?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이지만 지금이라도 네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너는 아름다워. 수술을 했건 안했건 상관없어. 너는 아름다운 여성이고 아름다운 인간이야. 그런 너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유치한 영혼이었을 뿐이지. 미안해.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9월 3일

조현옥

2007.08.31 01:47
*.62.89.4
[ 내 사랑, 나의 영혼들이여. 기억해 주오. 나 결코 잊지 않음을...
내 눈물 속에 고인, 푸르른 하늘. 그 위에 떠오른 더 푸른 네 얼굴...]

왜인지 전혀! 아예! 기필코! 알 수 없지만, 선생님 글을 읽으니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나네요. ^^
profile

명로진

2007.08.31 01:53
*.86.217.161
...

조현옥

2007.08.31 02:06
*.62.89.4
'그르나슈로 만든 와인은 레드일수도, 화이트일수도 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마시고 있는 그르나슈 와인이 레드인지 화이트인지 압니다.
선생님의 [와인예찬] 이 에세이일수도지 소설일수도 있지만,
읽는 사람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판단하게 됩니다. ^^

김희영

2007.08.31 09:25
*.101.103.3
누아든 블랑이든 맛있으면 그만이고,
소설이든 에세이든 재밌으면 그만이고............

근데 요 녀석 정말 이름부터 확 끌리네요..

정경화

2007.08.31 10:56
*.96.222.1
샤또뇌프뒤파프에서 메인으로 인정받은 그르나슈처럼,,
그 때의 그 그르나슈도 어딘가에서 인정받고 잘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샘님의 와인셀러는 저의 침샘을 마구 흘러넘치게 합니다..(질질..) 냠냠냠....
저도 이번 주말엔 쥑이는 와인을 한 잔 해야겟어요!!
profile

심산

2007.08.31 12:24
*.131.158.50
그런데 그르나슈는 정말 어려워
그르나슈 레드도 어떤 때는 놀라울만큼 묵직하지만 어떤 때는 괴로워...
그르나슈 화이트...이번에 내가 마신 것도 맛은 별로 였어...ㅠㅠ

정경화

2007.08.31 13:20
*.96.222.1
조금 더 선선해지면 맛좋은 샤또뇌프뒤파프한병 골라 들고 찾아뵐께요~..

한수련

2007.08.31 16:11
*.235.169.165
와~ 일러스트가 멋져요. 까미유 끌로델영화에 나오는 조각상을 응용한 느낌..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그렇게 자랑하셨던 세상에서 제일 예쁜여자가 이분이셨구나. ^^
profile

박민호

2007.08.31 17:13
*.142.232.179
희영누나~!^^"
'가르나차'는 이름부터 전혀 안땡기죠?!ㅋ 근데 그 놈(?)이 그 놈이랍니다..(앙드레김이 김봉남인것 처럼..)

김희영

2007.09.02 11:21
*.101.103.3
가르나차.....ㅋㅋㅋㅋㅋㅋㅋ

심정욱

2007.09.09 18:04
*.69.233.179
gsm 한 병 사들고 심산스쿨 와인반 찾아가고싶네요. 흑흑.
profile

심산

2007.09.09 19:14
*.131.158.42
하하하 정욱! 텍사스에서의 삶은 어때?
그곳에 미국 최대의 와이너리가 있다던데...견학 좀 미리 잘 해놔라...^^

심정욱

2007.09.11 17:37
*.69.233.179
와이너리 갈 여유까진 아직 없어서 가까운 와인가게만 들린다는....but,
다음 학기부턴 꼭 그 와이너리를 찾아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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