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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압도하는 요리와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31)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액셀, 1987) 속의 와인들
덴마크 여자 카렌 블릭센(1885-1962)은 28살에 남작 부인이 되어 아프리카 케냐에서 거대한 커피 농장을 경영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농장은 망해버렸고 불륜의 연인은 경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이다. 하지만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이때의 경험담을 자서전으로 남겼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훗날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인 빅히트를 기록했다. 그녀가 작가로서 사용한 필명은 이자크 디네센이었고, 그녀가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이다.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1권의 장편소설과 5권의 소설집 그리고 몇 권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으니 작가적 역량에 대한 인정은 일찌감치 이루어진 셈이다. 가브리엘 액셀 감독의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바로 이 이자크 디네센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모로 이채롭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덴마크 영화이고, 요리와 와인의 세계에 대한 진중하고도 탐미적인 고찰이며, 느슨한 스토리텔링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하여 숱한 영화상들을 석권한 걸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183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의 50년 세월을 다룬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덴마크 서해안 벽지의 청교도 마을이다. 이 마을의 목사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타고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기쁨보다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선택하여 남자들을 멀리한다. 놀라운 가창력을 가진 필리파(보딜 쿠어)에게 구애한 것은 파리의 오페라 가수 아쉴(장 필립 라퐁)이었다. 그는 결국 필리파의 사랑을 얻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려 35년이나 세월이 흐른 다음 이 자매에게 우리의 주인공인 바베트(스테판 오드란)를 보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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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당국으로부터 쫓기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바베트가 이들 자매 앞에 나타난 것이 1871년이니까 아마도 ‘파리코뮌’의 희생자인듯 하다. 누군가의 불행은 다른 이의 행운이 되기도 한다. 바베트는 이들 자매의 집에 기거하는 대신 ‘무보수 가정부 생활’을 받아들인다. 바베트의 존재가 이들 자매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는 연로하신 목사님의 은밀한 기도 하나만으로도 능히 증명된다. “하느님 아버지, 바베트를 우리 집에 선물로 보내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무려 15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묵묵히 무보수 노동을 해오던 바베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들이닥친다. 파리에서 발행하는 복권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의 상금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복권 당첨금은 그들 모두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바베트에게는 파리로 돌아가 새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정착금을 의미했고, 두 자매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는 이별 통고를 의미했던 것이다. 바베트는 이 시점에서 실로 엉뚱한 부탁을 한다. “목사님 탄생 100주년 기념일 만찬을 제가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통 프랑스 코스요리로 대접해드리고 싶어요. 비용은 물론 전액 제가 부담하고요.”
느릿느릿 진행되던 영화 [바베트의 만찬]이 돌연 생기와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이 순간부터이다. 경건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빈한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걸맞을듯한 회백색의 덴마크 해안 깡촌은 이후 바베트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녀가 파리로부터 직수입해온 요리의 재료들과 와인 상자들을 보자 온 마을이 술렁거린다. 기껏해야 가자미 삶은 요리와 에일 브레드(Ale Bread, 맥주빵)로 모든 끼니를 해결해온 그들의 눈 앞에 정통 프랑스식 코스요리란 그야말로 ‘딴 나라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화적 충격(!) 앞에 잔뜩 주눅 들은 그들은 해괴한 신성동맹(?)까지 맺는다. “음식의 미덕은 소박함입니다. 그녀의 요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대신 종교 이야기만 하자구요.”
만약 또 다른 자매 마르티네(비르지트 페더스피엘)의 구애자였던 로렌즈 장군(얄 쿨레)이 만찬에 동석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끝끝내 이 ‘정신을 압도하는 요리와 와인’에 대하여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내며 화려한 생활을 맛보았던 로렌즈는 연이어 나오는 바베트의 코스 요리와 와인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탄을 늘어놓는다. 이를테면 그는 ‘바베트의 만찬’에서 격정적인 해설자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하긴 요리와 와인에 대하여 약간의 상식만 갖춘 사람이라면 바베트의 만찬 앞에서 입을 떡 벌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첫 번째 요리인 거북이 스프가 등장할 때 함께 제공되는 식전주는 아몬티야도(Amontillado)이다(한글 자막에는 물론 잘못된 표기로 나온다). 스페인 셰리(Sherry) 중에서도 고급으로 치는 피노(Fino)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지만, 숙성을 오래 시키고 알콜 농도를 높인 최고의 식전주이다. 로렌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마을 촌로들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일 뿐이다. 두 번째 요리인 블리니스 데미도프와 마리아주를 맞춘 와인은 당연히 샴페인이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맛본 로렌즈는 믿을 수 없다는듯 큰 소리로 외친다. “이건 1860년 빈티지의 뵈브 클리코(Veuve Clicqout)가 틀림 없어요!” 경건한 촌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너무 맛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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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리 요리인 카이유 앙 사코파주와 더불어 드디어 오늘의 메인 와인이 등장한다. 바로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이다. 나는 클로 드 부조가 화면에 비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아 클로 드 부조! 일찍이 12세기부터 시토파 수도회가 개척한 부조 마을에서도 단 하나뿐인 그랑 크뤼 포도밭 클로 드 부조! 화면 밖의 나뿐만이 아니다. 화면 속의 촌로들도 더 이상은 ‘경건하고 소박한 정신’의 통제를 견뎌내지 못한다. 그들은 비로소 활짝 웃고, 실없는 소리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지상에서의 삶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축제를 마음껏 즐긴다. 그것이 요리와 와인의 힘이다. 그리고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가장 유쾌한 순간이기도 하다.
정작 영화의 감동은 ‘바베트의 만찬’이 끝나고 난 다음에 찾아온다. 자매들은 이제 바베트가 자기들을 떠나 파리로 가버리려니 생각한다. 하지만 바베트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 집에 남겠다고 한다. 왜? “제가 가진 돈을 다 썼거든요.” 맙소사, 바베트는 그날의 만찬을 위해 자신의 전재산 1만 프랑을 다 쏟아부었던 것이다. 놀라움과 미안함으로 울상이 된 자매들이 애달프게 묻는다. “가진 돈 하나도 없이 남은 삶을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바베트의 담담한 답변이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중앙SUNDAY] 2008년 5월 4일
아몬티야도나 클로 드 부조 하나씩만 해도 몇 페이지는 써야 하는데...[폐인]
단행본으로 묶어낼 때는 아무래도 다시 써야할듯...[원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