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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과 훌륭한 와인의 관계
심산의 와인예찬(35)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2004)의 슈발 블랑 1961
마일스(폴 자아마티)는 한심한 중년 남자다.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내심 소설가로서 데뷔하기를 꿈꾸고 있는데, 그가 완성한 장편소설 초고들은 모든 출판사로부터 예외 없이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의 이 볼품없는 중년 남자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오직 와인뿐이다.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은 한때 반짝했다가 이제는 알아보는 이도 별로 없는 왕년의 배우인데,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치마만 둘렀다 하면 무작정 껄떡대며 작업(!)에 들어가는 대책 없는 플레이보이다. 그런 잭이 이제 일주일 후면 결혼을 한다. 마일스가 잭과 함께 ‘총각파티’를 즐길 요량으로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의 와이너리 투어를 떠나는 여정을 그린 영화가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웨이]다.
마일스에게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여인이 있다. 서로에 대해서 약간의 호감은 품고 있었으나 더 이상은 다가서지 않고 그저 좋은 친구로만 남아있는 마야(버지니아 매드슨). 마일스가 마야에게 들른 것은 물론 잭의 충동질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여자를 만나야 새끼 치기를 하건 가지 치기를 하건 또 다른 여자를 만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잭의 흑심은 제대로 적중하여 이제 와이너리에서 일하고 있는 섹시한 이혼녀 스테파니(샌드라 오)가 이들의 여정에 합류한다. 그렇게 해서 서로 완전히 다른 네 명의 캐릭터가 ‘겉보기에는 즐거운’ 더블데이트를 즐기게 된 것이다.
와인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벌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스테파니의 집이다. 초저녁부터 부어라 마셔라 해댄 덕에 잔뜩 취해버린 잭과 스테파니는 이미 괴성을 질러대며 격렬한 섹스에 탐닉하고 있는 중이다. 소심한 마일스와 진중한 마야는 스테파니의 와인셀러를 둘러보며 조용히 담소를 나눈다. “내 집에도 제법 괜찮은 와인이 있지요.” 마일스가 수줍게 말하자 마야가 묻는다. “가령 어떤 것?” 대답하는 마일스가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삐져나오는 자부심까지 숨길 수는 없다. “슈발 블랑 1961년산이요.” 이번엔 스크린 밖의 내가 마음 속으로 탄성을 내지른다. 와우 슈발 블랑? 게다가 1961년산이라구?
슈발 블랑(Cheval Blanc)은 어떤 와인인가? 보르도의 지롱드 강 우안에 위치해 있어 1855년의 그랑 크뤼 클라세에서 1등급 와인에 들지는 못했지만, 당당히 그들 1등급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는 와인이다. 실제로 현대 보르도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꼽으라면 1등급 와인 5개에다가 4개를 덧붙여 모두 9개를 꼽는데 슈발 블랑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1961년산이라니! 개인적으로 나는 1961년 빈티지에 뻑 가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와 생년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도 슈발 블랑의 1961년은 매우 특별하다. 모든 와인의 역사는 이렇게 대문자로 기록한다. “과거의 슈발 블랑을 현재의 슈발 블랑으로 만든 것은 196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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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애호가들처럼 단순한 부류도 없다. 그들은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는 와인의 수준에 따라 그를 평가한다. 나 역시 이런 제멋대로의 막무가내식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일스가 수줍어 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으로 슈발 블랑 1961을 가지고 있노라고 고백했을 때 나는 그를 다시 봤다. 저 녀석, 겉보기완 다르게 썩 괜찮은 놈이로군? 마야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왕방울만한 눈을 크게 뜨며 이렇게 반문했다. “와우, 정말이요? 왜 당장 이리로 가져와서 함께 마시지 않는 거에요?!”
가슴에 손을 얹고 반문해보라. 만약 당신이 마일스라면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했겠는가? 잠시 망설였겠지만 답변이야 빤하다. “나중에, 아주 좋은 일이 생긴, 그런 특별한 날에 마시려고 아껴두고 있어요.” 쪼잔해 보일지 몰라도 정직한 반응이다. 하지만 마야는 빙긋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던진다. “특별한 날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날이 바로 특별한 날이 되는 거죠.”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마일스는,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겸연쩍은 미소를 띄우며 슬그머니 눈길을 내리깔 뿐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자 마일스에게 ‘특별한 날’이 온다. 잭의 결혼식장에서 이혼한 전처와 마주쳤는데, 그녀가 새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마일스는 그 소식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자신과 살 때는 극구 임신을 회피하던 그녀였다. 이혼은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마일스였다. 충격과 분노를 가눌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저 홀로 ‘쓰라린 코미디’를 연출하고야 만다.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를 우적거리며 종이봉투로 가린 슈발 블랑 1961을 플라스틱 컵(!)에 따라 벌컥 벌컥 마셔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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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메인 마일스가 슈발 블랑 1961을 꾸역꾸역 마시던 그 장면은 오래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사이드웨이]에서 가장 웃기고 서글펐던 장면이다. 특별한 날 마시겠다고 꼬불쳐 두었던 그의 인생 최고의 와인. 결국 특별한 날에 마시긴 했다. 특별히 행복한 날이 아니라 특별히 불행한 날이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본래 어리석은 자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자탄에 빠지는 법이다. 스테파니의 집에서 마야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와인을 이야기하던 그날 밤은 정말 멋졌다. 어쩌면 그의 인생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 수도 있었던 밤이었다. 왜 그날 마야의 급작스러웠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슈발 블랑 1961을 가져와 함께 마시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그날 밤이 그의 삶에서 ‘가장 특별한 날’로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이드웨이]는 와인과 관련된 영화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작품이다. 이 영화 속에 펼쳐지는 와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천천히 음미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마일스 인생 최고의 와인 슈발 블랑 1961과 더불어 마야가 던져준 의미심장한 금언 하나를 가슴 속에 새겨두기로 하자. 잊지말자. 특별한 날이 되어야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날이 곧 특별한 날이 된다.
[중앙SUNDAY] 2008년 6월 8일
과거 [한겨레] 영화 기자였던 임 범이 '임범의 영화 속 술(와인 아닌 술)'의 연재를 시작하는 바람에...
덕분에 글 쓰는 속도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이거 기뻐해야 될지 안타까와해야 될지 원...ㅋㅋㅋ
하지만 오랜 친구인 임 범과 함께 지면을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