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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들의 개인금고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었을까?
심산의 와인예찬(46) [뱅크잡](로저 도널드슨, 2008)의 동 페리뇽 1947
1971년 런던 베이커스트리트의 로이드 은행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대담한 강도들이 땅 밑에 터널을 파고 들어가는 ‘고전적 수법’으로 VIP 고객 전용의 개인금고들을 털어간 것이다. 사건 자체보다 놀라운 것은 사후의 반응이다. 100명 이상의 VIP들은 도난당한 물품 리스트의 신고를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문과 방송 등 모든 언론매체들은 더 이상의 보도를 자제했다. 영국군사정보국(MI5)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2054년까지 국가기밀로 분류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뱅크잡]은 미궁에 빠져 버린 이 실제의 사건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범죄 스릴러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는 더 없이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엄청난 수의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그들 모두의 개성을 원 없이 드러내는 그 원숙한 작가적 기량이 놀라웠고, 1970년대의 런던 뒷골목을 가감 없이 그려낸 미술과 촬영도 일품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낭만적 세계관을 비웃는 그 쓰라린 ‘영국식 유머’가 가슴을 묵지근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우디 앨런의 말마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 테리(제이슨 스테이섬)는 별 볼 일 없는 중고자동차 딜러이다. 장사는 안 되고 빚은 늘어만 가고 깡패들은 수시로 출몰하여 그를 괴롭힌다. 버겁고 비루한 삶 앞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그의 앞에 아름다운 옛애인 마틴(새프런 버로우즈)이 등장한다. 그녀의 제안은 황당하고도 심플하다. 로이드 은행의 경보장치가 작동되지 않는 시간을 알아냈으니 터널을 뚫고 들어가 VIP들의 개인금고들을 털어오자는 것이다. 머뭇거리는 테리에게 마틴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날리며 이렇게 속삭인다. “걱정할 거 없어. 모두 다 구린 돈들이야. 아무도 신고하지 않을 거야.”
[뱅크잡]에는 인상적인 와인 신(scene)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테리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막 은행강도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직전에 아내와 함께 하는 레스토랑 신이다. 사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와인에서 그 라벨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라벨을 포함한 와인병 전체를 짚으로 감싸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짚으로 감싼 와인병’ 자체가 그 와인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전통적 대중주 키안티 혹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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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안티라는 와인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이 AD 760년경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한다. 그만큼 오래된 와인이다. 키안티가 너무나 유명하니까 키안티 주변의 이곳 저곳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키안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분에 키안티라는 지역의 범위가 터무니없이 커져버렸다. 이렇게 되면 ‘오리지널’ 혹은 ‘원조’에 해당하는 키안티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 지역의 이름을 더욱 세분화한다. 그것이 키안티 클라시코다. 원조 키안티 혹은 키안티 클라시코는 오동통한 병을 짚으로 감싸서 출시했는데, 그 병의 이름을 피아스코(Fiasco)라고 부른다. 밭일 하는 농부들이 병나발을 불다가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던져놓아도 깨지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뱅크잡]의 레스토랑 장면에 등장한 와인이 바로 이것이다.
두 번째의 와인 신은 은행강도들의 성공 자축 파티 때 나온다. 테리 일당은 너무도 쉽게 로이드 은행의 지하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그곳에는 영국에서 돈 깨나 있고 힘 깨나 쓴다는 VIP들의 개인 금고들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건물 철거용 장비들을 휘둘러 그 소중한 개인 금고들을 까부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들을 꺼낸다. 과연 VIP들의 개인 금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현금과 채권과 주식.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금괴와 다이아몬드와 명품 보석함. 이 역시 진부할 뿐이다.
보다 흥미로운 물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앙증맞은 여자 팬티에는 이렇게 써 있다. “그대와 자고 난 다음에는 한 번도 안 빨았어요.” 강도들은 그 팬티를 머리에 쓰고 킬킬댄다. 애인과 주고받은 러브레터도 있고 남 몰래 써놓은 소중한 일기도 있다.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다. 정신없이 금고들을 열어보던 테리가 돌연 환호성을 지른다. “이것 봐, 여기 샴페인도 있어!” 껄렁한 동네 깡패들로서는 처음 보는 물건일 가능성이 많다. 라벨을 들여다보던 테리가 이렇게 외친다. “와우, 1947년산이야!”
펑! 펑! 펑!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은행 금고 한복판에서 강도들이 샴페인을 딴다. 일확천금을 달성한 강도들답게 그 값비싼 샴페인을 서로에게 뿌려대며 자신들의 쾌거를 찬양한다. [뱅크잡]에서 가장 유쾌한 장면이다. 그 샴페인이 뭐냐고? 와인애호가라면 단 한번 힐끗 보아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유려한 병모양과 독창적인 병색깔의 샴페인, 바로 동 페리뇽(Dom Perignon)이다. 모에 샹동(Moet & Chandon)의 스페셜 퀴베인 동 페리뇽, 그 중에서도 그레이트 빈티지에만 생산한다는 동 페리뇽 빈티지 샴페인! 단언컨대 희대의 은행강도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이보다 더 근사한 것은 없을 것이다.
영화가 이쯤에서 끝났다면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키안티 클라시코나 홀짝거리다가 갑자기 동 페리뇽 1947로 병나발을 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인생대역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제 막 터닝 포인트를 돌았을 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진실은 언제나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복잡”한 것이다.
VIP들의 개인 금고 안에는 그들이 ‘봐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급 매춘업자의 고위직 경찰 뇌물상납 장부, 현직 장관의 SM 파티 현장 사진, 사이비 좌파 지도자의 더러운 거래, 영국 왕실의 존망을 뒤흔들 희대의 스캔들! 어느 모로 보나 얼치기 동네 건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 조종자였던 영국 정보부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거야.” 단순한 은행 강도 영화 [뱅크잡]이 진정 흥미진진한 스릴러 혹은 잔혹한 사회 드라마로 돌변하며 관객을 사로잡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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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8
년 11월 16일
007 대신에 small time crooks 를 보낸 거로군요!ㅋㅋㅋ
(마틴은 정인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