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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혹은 선망의 음료
심산의 와인예찬(49) [프라이스리스](피에르 살바도리, 2006)의 샴페인 떼뗑제
[프라이스리스]의 국내 개봉 당시 홍보에서 가장 방점을 두었던 단어는 ‘아멜리에’였다. 전세계에서 놀라운 흥행성적을 거두었던 [아멜리에](장-피에르 죄네, 2001)의 귀여운 여배우 오드리 토투가 주연을 맡은 까닭이다. 하지만 아멜리에의 이미지를 가슴에 품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필시 당황하거나 실망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렌느(오드리 토투)의 직업을 우리말로 표현하려 할 때 ‘꽃뱀’보다 더 나은 단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렌느는 나이 많고 부유한 남자들의 정부다. 그들을 유혹하여 명품으로 치장하고 용돈을 타 쓰는 것이 그녀의 직업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들 중의 누군가와 결혼하여 정식으로 상류사회에 진입하고 싶다. 하지만 나이 많고 부유한 동시에 멍청한(!) 남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정부들은 하나 같이 계산적이며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육체적으로도 너무 노쇠(!)하여 그녀가 안간힘을 다 해 섹스 어필을 해도 이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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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만남은 그녀의 생일날 밤에 이루어진다. 곯아떨어진 정부 곁에 누워 멀뚱멀뚱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가 너무 지루했던 그녀는 저 홀로 호텔 바로 내려갔다가 장(가드 엘말레)이라는 젊은 남자와 마주친다. 관객은 알고 있다. 장은 그 호텔 칵테일 바에서 일하는 가난한 웨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이렌느는 모른다. 장을 젊은 부호로 파악한 그녀는 곧바로 작업에 돌입한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적어도 근사한 음악을 들으면서 칵테일 한 잔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칵테일 제조라면 장이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샴페인 섞은 칵테일이 좋겠군요. 그는 능숙한 바텐더답게 각종 과일과 주류를 섞은 다음 그 잔에 샴페인을 들이붓고 귀여운 종이우산까지 꽂아 이렌느에게 내민다.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킨 이렌느는 종이우산을 제 머리에 꽂고 다시 주문한다. 다른 칵테일로 한 잔 더. 결국 그녀의 머리에는 형형색색의 종이우산들이 만개(滿開)한다. 행복하게 취한 두 남녀가 한 침대에 눕게 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이를테면 장이 만들어 준 그 ‘샴페인 섞인 칵테일’이 ‘사랑의 묘약’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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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빤하다. 나이 많고 부유한 정부를 택할 것인가 젊고 가난한 연인을 택할 것인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냐 이수일의 사랑이냐. 솔직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덕분에 영화도 그저 그렇다. 더 나아가 섹스와 사랑을 별개의 항목으로 간주하는 프랑스식 태도가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꼭 보라고 권유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샴페인에 좀 더 집중해보자.
처음 만난 그날 밤, 장이 만들어 준 ‘사랑의 묘약’에 칵테일한 샴페인은 떼뗑제(Taittinger)였다. 이후 떼뗑제는 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계속 출연(?)한다. 정부에게 버림 받은 이렌느가 수첩에 적어놓은 메모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다. 예전에 함께 떼뗑제를 마셨던 남자에 대한 메모다. 새로운 유혹의 대상을 물색하여 만나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장 때문에 놓치고 만다. 화가 난 이렌느는 장에게 바가지를 씌울 요량으로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값비싼 요리와 와인을 마구 시킨다. 이때 마시는 샴페인도 예외 없이 떼뗑제이다.
이렌느가 다른 남자와 호텔방에 들어가자 장이 룸서비스를 가장하여 전화로 괴롭히는 장면이 있다. 이때 호텔방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가 이렌느에게 따라주고 있는 샴페인도 물론 떼뗑제이고, 영화의 대미에 해당하는 대형 파티장에서 이렌느가 옛남자를 유혹하러 들고 가는 샴페인 역시 떼뗑제이다. 해도 해도 너무 했다. 한 마디로 [프라이스리스]에는 떼뗑제 밖에 안 나온다. 이 정도면 거의 ‘메타포’의 수준이다. 도대체 떼뗑제는 어떤 샴페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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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뗑제의 역사는 길다. 피에르 떼뗑제가 이 회사를 소유하게 되면서 자신의 가문 이름을 붙인 것은 1932년이지만, 이 포도원의 역사는 17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샴페인하우스로는 로랑 페리에(Laurent Perrier) 다음으로 규모가 큰데, 생산량의 50% 가까운 포도를 자신의 밭에서 직접 키우는 보기 드문 회사이다. [프라이스리스] 속의 떼뗑제는 ‘선망의 음료’라는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도록 꿈꾸어왔으나 내 것이 아닌 것,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어떤 것, 하지만 한번 맛보면 결코 한 눈을 팔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
[프라이스리스]는 명품들로 도배를 한 영화다. 이 점에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데이비드 프랭클, 2006)에 비견될만하다. 영화 속에서 오드리 토투가 즐겨 입었던 아자로(AZZARO) 홀터넥 드레스가 한 영화의상 경매에서 무려 7억 여원에 팔렸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멋진 호텔과 레스토랑들도 흥미로운 눈요기 거리임에 틀림없다. 대부분 몬테카를로나 니스 같은 유럽의 유명 휴양지에서 촬영된 곳들이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와인신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완전히 망가진 형태’로 나온다.
영화의 대미에 해당하는 대형 파티장이다. 좌절한 이렌느를 찾기 위하여 장이 다섯 개의 샴페인 잔을 쟁반에 담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린다. 오직 바텐더 혹은 웨이터만이 할 수 있는 동작이다. 이제 더 이상 ‘있는 척’하며 허세를 피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파티장의 부유한 남녀들이 그의 쟁반에서 떼뗑제를 한잔씩 낚아채간다. 그리하여 그들의 쟁반 위에는 더 이상 떼뗑제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이 가난하고 불운한 연인들은 비로소 서로를 편안하게 마주보는 것이다.
영화는 무일푼이 되었지만 사랑을 얻은 장과 이렌느를 비추면서 끝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특유의 결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독자 여러분의 현실은 이와 달랐으면 좋겠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떼뗑제 한 병 정도는 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으시기를! 그리하여 영롱한 기포가 가득한 샴페인 잔을 경쾌하게 맞부딪치며 서로 이렇게 덕담할 수 있으시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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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8년 12월 28일
영화는 '거품이 빠져야 사랑이 보인다'고 말하는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