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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과 본드걸들 그리고 와인들
심산의 와인예찬(50) 007 와인의 역사/서문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애시당초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무심결에 그의 어깨를 툭 쳤고, 그는 엄청난 데이터들을 쏟아냈다. 007 영화 속에 나오는 와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지고 보면 무모한 도전이다. 007은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영화 역사상 최장수 프랜차이즈 기록을 자랑하고 있는 작품이다. 최초의 작품이 1962년에 발표된 [007 살인번호](Dr. No)이고, 최근의 작품이 2008년에 발표된 [007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이니,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세계의 스크린을 지배해온 셈이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무려 22편의 007 영화를 보았다. 이쯤 되면 박사학위 논문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덕분에 007 시리즈의 전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007 영화의 역사인 동시에 007 와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20세기 후반 세계정세의 역사이고, 007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명품 자동차와 명품 의상의 역사이기도 하며, 다양한 변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악당들과 본드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기에 신무기, 액션 디자인, 카 스턴트, 그리고 주제가를 부른 당대 최고의 가수들까지 합세하고 나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될지를 몰라 황망하기 그지없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007 시리즈는 ‘엔터테인먼트의 진수성찬’이다. 그 다채롭고 광대한 컨텐츠들을 한 토막의 짧은 글 안에 담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007 와인의 역사’는 몇 회에 걸쳐서 연재될 것이며, 이 글은 그 총론 혹은 서론에 해당한다. 007을 다루며 그 논의를 와인에만 국한시킨다는 것도 우습다. 저 유명한 “보드카 마티니, 휘젖지 않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는 어쩔 것이며, 그 화려한 샴페인 칵테일들은 또 어쩔 것인가? 본드걸들의 아찔한 몸매와 비키니를 감상하고 그들의 뒷담화를 까는 즐거움(!) 또한 포기할 수 없다. 예감컨대 아마도 매우 계통 없는 혹은 정신 산만한 글이 될듯 하다. 널리 혜량하시어 즐겁게 읽어주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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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원작자는 이언 플레밍(1908-1964)이다. 그는 단순한 첩보소설 작가가 아니라 실제의 스파이였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이튼 칼리지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등을 떠돌며 다양한 언어들을 익힌 다음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해군정보부로 들어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단순히 해군정보부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8년 8월 15일자 [더 타임스]의 인터넷판은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다. 그가 17F라는 암호명으로 다양한 스파이 활동을 벌여왔으며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창설에도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언 플레밍은 영국의 비밀병기로 알려진 제30강습부대를 육성했다. 사회부적격자들을 모아 훈련시킨 일종의 게릴라 부대였는데, 적국 대사관 금고를 터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비공식 조직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전략정보국(OSS)을 위하여 ‘이상적인 정보기관과 첩보원’에 대한 72쪽 분량의 메모를 작성한 적도 있는데, 이 문건은 현재 런던의 임페리얼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이 메모에서 밝힌 ‘훌륭한 첩보원의 자질’이 007이라는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잘 훈련된 관찰력과 분석력, 평가능력, 절대적인 분별력, 침착성, 충성심, 언어능력과 경험을 갖춰야 하며, 나이는 40세~50세가 적당하다.”
이언 플레밍은 1953년 최초의 007 소설인 [카지노 로열]을 발표한 이후 1966년의 [옥토푸시](유작)에 이르기까지 매년 한 권 꼴의 ‘본드북’을 써냈다. 이 시리즈가 대박이 나서 큰 돈을 번 그는 자메이카의 영지를 구입하여 ‘골든아이’(그가 참여했던 작전명이다)라 이름 붙이고 말년을 보내다가 196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야말로 007 시리즈에나 나올 법한 특이한 삶이다. 이언 플레밍은 세 번째 영화인 [007 골드핑거](Goldfinger, 1964)가 개봉하기 한 달 전에 사망했다. 그가 자신의 사망 이후에 속속 만들어진 007 영화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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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건 이후의 007 영화들은 하나 같이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영화 속의 캐릭터와 소설 속의 캐릭터는 사뭇 다르다. 소설 속의 007이 보다 현실적이고 진중하며 냉철하다면, 영화 속의 007은 판타지적이고 유들유들하며 한없이 가볍다. 이 점을 들어 이언 플레밍의 팬들은 매번 007 영화가 새로 개봉할 때마다 격렬한 찬반토론을 벌이곤 한다.
007 시리즈 전작을 다시 보면서 내가 새삼 통감한 것은 ‘세월’이다. 중딩 시절의 나는 여느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007 영화를 보면서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었고 경탄에 경탄을 거듭했었다. 아니 저렇게 놀라운 무기가 있다니, 아니 저렇게 여자를 잘 꼬시다니, 아니 저렇게 싸움을 잘 하다니! 하지만 이제 와 다시 들여다보는 007은 한 마디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니 저렇게 허술한 플롯이 있다니, 아니 저렇게 여자를 비하하다니, 아니 저렇게 말도 안되는 액션을 했다니!
오해 마시라. 007 시리즈를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제는 이 영화와 일정한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007 시리즈는 시끌벅적한 소동극이고, 거대한 농담이며, 한 없이 가벼운 코미디(!)이다. 이 점에서 나는 로저 무어와 견해를 같이 한다. 그는 숀 코너리와 조지 레젠비에 이어 세 번째로 007 역할을 맡은 배우이고, 이 시리즈 최다 출연자(7회)이기도 한데, 너무 능글능글하고 장난스럽다는 팬들의 악평에 대하여 이렇게 껄껄 웃으며 되받아친 바 있다.
“본드 영화는 웃기죠. 그는 스파이인데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요. 전세계의 모든 바텐더들이 그를 보면 즉시 ‘보드카 마티니, 휘젖지 않고 흔들어서’를 내놓지요. 코미디 아닙니까? 나는 본드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죠. 그저 웃자고(for laugh) 만든 영화일 뿐이에요.” 이제 이 ‘그저 웃자고 만든’ 영화들 속에서 ‘농담처럼 빛나는’ 와인들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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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9년 1월 11일
몇번째 007이 맘에 드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