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05-05 00:45:11 IP ADRESS: *.110.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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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렛은 보르도 와인의 애칭


심산의 와인예찬(56)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가이 해밀턴, 1971)의 샤또 무똥로쉴드 1955

 

신예 조지 레젠비를 기용하고 캐릭터에 파격적인 변화를 주었던 [여왕폐하 대작전](6/1969)이 흥행에서 참패하자 제작진이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구관이 명관’이라는 격언이다. 그들에게는 숀 코너리를 찾아가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딱 한번만 더(!) 출연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덕분에 숀 코너리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계약을 맺게 된다. 개런티 1200만 달러에 더하여 흥행 수익의 12.5%의 지분!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가이 해밀턴, 1971)는 여러 모로 퇴행적인 작품이다. 이는 아마도 변신을 꾀했던 전작이 차가운 외면을 당하자 반대 급부적으로 형성된 현상인 것 같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는 전형적인 마초이즘 혹은 파렴치한 맨쇼비니즘의 태도를 분명히 한다. [여왕폐하 대작전]에서 동 페리뇽 병을 깨서 휘두르던 ‘강하고 독립적인 본드걸’의 이미지는 당분간 폐기처분된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의 본드걸은 미국의 질 세인트 존이었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티파니 케이스였는데, 매혹적이긴 하나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여자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잔뜩 적대감을 표시하다가도 일단 섹스를 하게 되면 무조건 나긋나긋해진다든가, 비키니 팬티 뒤에 중요한 물건을 숨겼다가 적에게 대뜸 발각된다든가, 기껏 총을 쏘고 나서는 그 반동을 못 이겨 아래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식이다. 21세기의 페미니스트들이 본다면 너무 화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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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질 세인트 존이라는 여배우에 대하여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 그녀는 역대 본드걸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 중에서도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손꼽힌다. 여지껏 4번 결혼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았으며, 한때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와 전(前)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연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IQ가 162에 이르는데 요리 관련 저서를 여러 권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며, 현재 4번째 남편인 배우 로버트 와그너와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게이 캐릭터들의 등장이다.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면서 온갖 나쁜 악행들을 저지르는 똘마니 킬러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게이로 설정되어 있으며, 모든 면에서 ‘웃기고 재수 없는 놈들’로 묘사되고 있다. 형편없는 외모, 열등한 지적 수준, 마비된 양심 혹은 윤리의식, 썰렁하기 그지없는 유머, 그리고 다정하게 꼭 잡은 두 손. 이 영화를 보면 1970년대 초반의 미국 주류사회가 당시의 게이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는 인상적인 와인신이 여러 번 나온다. 먼저 007이 직속상관인 M 및 여타의 고위관리들과 더불어 셰리(Sherry)를 평하는 장면이다. 007이 셰리 한 잔을 코에 대고 킁킁대더니 자신 있게 말한다. 51년산이군요. M이 잘난 체 하며 끼어든다. 이 사람아, 셰리에는 원래 빈티지가 없는 법이라네. 하지만 007은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반박한다. 아니 원액이 만들어진 해를 말하는 겁니다. 최초의 원액이 1851년산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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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웃다가 뒤로 자빠질 뻔 했다. 스페인 와인의 상징이며 세계 3대 강화와인으로 꼽히는 셰리는 ‘솔레라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반자동 블렌딩 방식으로 제조된다. 일반적인 와인들이 공기와의 접촉을 극히 꺼리는데 반해 ‘고의로 산화시켜’ 만드는 이 와인은 오크통들을 층층이 쌓아놓고 그 안의 원액들을 뒤섞는 방식으로 만드는데, 위에 인용한 007의 언급은 맨 아래층의 오크통(솔레라)에 채워져 있는 것이 1851년산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알아맞히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오직 영화 속의 007에게만 가능하다.”

 

또 다른 와인신은 영화의 에필로그에 나온다. 원래 007 최대의 적은 라스트에 제거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적의 똘마니들이 마지막 공격을 해온다. 그것이 007 영화의 컨벤션들 중 하나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썰렁한 게이 킬러들’이다. 그들은 소믈리에와 웨이터로 변장하고 카트 위에 음식들과 와인들을 잔뜩 싣고서 밤바다 크루즈 위의 007과 본드걸에게 접근한다.

 

킬러가 자랑스럽게 코르크를 따며 말한다. 샤또 무똥로쉴드(Château Mouton-Rothschild) 1955년입니다. 무언가 미심쩍은 낌새를 눈치챈 007이 슬며시 운을 떼본다. 아주 훌륭한 와인이군...하지만 이런 요리들에는 클라렛(Claret)이 더 어울릴 텐데? 움찔하며 당황한 킬러가 허둥지둥 얼버무리려 한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마침 클라렛이 떨어져서. 그의 대답에 007은 피식 실소를 내뱉는다. 이 친구야, 무똥로쉴드가 바로 클라렛이라네! 그리고는 킬러들이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틈도 없이 그들의 얼굴과 꽁무니에 불을 붙여서는 크루즈 아래의 밤바다로 녀석들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클라렛이란 영국인들이 보르도 와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애칭이다. 아마도 보르도 것을 마시기 이전에 그들이 마셨던 와인들에는 부유물들이 많이 떠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르도 와인은 청징과 여과가 잘 되어 있어서 매우 맑았다. 클라렛은 영어의 클리어(clear)와 프랑스어의 클레르(claire)에서 파생된 신조어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웬만한 와인애호가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애칭이다. 그런데 우리의 불쌍한 게이 킬러들은 그걸 몰랐다. 덕분에 꽁무니에 불이 붙여진채 밤바다로 던져져 죽어야 했다니 무지의 대가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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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또 무똥로쉴드(Château Mouton-Rothschild)

1855년에는 2등급으로 분류되었으나 수십 년에 이르는 법정 투쟁 끝에 1973년 마침내 1등급으로 승격한 보르도 뽀이약 지역의 그랑 크뤼. 매년 세계 정상급 화가들이 라벨을 그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5년은 무똥로쉴드 최고의 빈티지들 중의 하나.

 

[심산스쿨] 2009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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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05.05 00:53
*.110.20.70
....여기까지가 내가 청탁을 받고 쓴 원고!
담부터는 어찌될지...노바디 노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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