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백성들의 야구경기
김현석 [YMCA 야구단](2002)
야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기원만큼은 확실하다. 대한제국의 말기인 1905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고 새 것이 옛 것을 갈아치우는 혼돈의 시대, 황성(서울) 거리 한 복판에 낯선 방이 나붙는다. "YMCA 베쓰볼 단원모집" 김현식 감독의 데뷔작 [YMCA야구단](2002)은 문헌상 조선 최초로 결성된 아마추어 야구단으로 기록되는 이 실존팀의 흥망성쇠를 애잔한 유머로 다루고 있는 영화다.
오랫동안 글공부에 매달려 왔으나 돌연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이호창(송강호)은 어느날 전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당시 막 득세하던 친일파의 아들 류광태(황정민)와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차며 놀다가 그것이 남의 집 마당으로 떨어져버린 까닭이다. 뜻밖에도 쪼그라들어 버린 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던 그에게 멋진 정장을 한 서양선교사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그건 발로 차는 공이 아니야. 손으로 던지고 방망이로 때리는 공이지. 베이스볼이라고 불러"
[YMCA야구단]의 매력은 야구라는 신생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 시대를 다채롭게 조망해본다는 데 있다. 서양선교사와 일본군인이 활보하던 거리, 유생으로 대표되던 옛 권위가 몰락하던 시대, 새로운 질서 앞에서 갈등하던 양반과 상놈,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기독교 계열의 신여성 민정림(김혜수)과의 어긋난 로맨스마저도 이 영화 속에서는 향수 어린 추억의 풍속화가 된다.
하지만 도대체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무슨 놈의 야구 타령이냐고? 너무 타박하지는 말기 바란다. [YMCA야구단]은 그러힞 않아도 스포츠맨십과 민족의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영화의 유머는 안쓰럽고도 애잔하다. 스트라이크를 '수투락(秀投樂:빼어나게 던지니 즐겁구나)'이라 고쳐 부르고, 포수가 마스크 대신 하회탈을 뒤집어쓰는 것은 은근한 실소를 자아낸다. 그 유머의 절정은 일본군 야구단과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말을 돌보는 도령(조승우)이 벽력처럼 내지르는 분노의 일갈이다. "암행어사 출도야!" 이 시대착오적인 단말마의 절규는 우리의 배를 잡게 만들고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렇다. 나라 잃은 백성은 서러울 뿐이다. 제 아무리 야구를 잘한다고 해도.
[한겨레] 2003년 12월 17일자
광복 반백년을 간신히 넘은 지금이지만 왜 이렇게 '우리 나라는 이래서 안돼.',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어.' 식의 말들을 가볍게 하는지... 자신의 울타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양은 늑대에게 잡혀 먹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