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소녀의 통쾌한 바나나킥
거린더 차다 [슈팅 라이크 베컴](2002)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계 사춘기 소녀 제스(파민다 나그라)의 일상은 온통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인도 상류계층 특유의 엄격한 가정교육은 그의 숨통을 조이고,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인종 차별의 벽은 그의 행동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제스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피어나는 때는 단 한순간 뿐이다. 웃통을 벗어젖힌 껄렁한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는 것. 다락방에 마련된 그의 침대 위에 걸려있는 것은 물론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대형 브로마이드다.
거린더 차다 감독의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2002)]은 그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저렇게 막 갖다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우려는 일찌감치 접어두어도 좋다. 베컴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승낙해 준 덕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축구 코치 사이먼 클리퍼드가 직접 배우들의 훈련을 맡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전세계가 월드컵의 열기로 뜨겁던 2002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의 자국 영화시장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영화 속에서 축구는 장벽 속에 갇힌 한 외로운 소녀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스는 동료 여자 축구 선수 줄스(카이라 나이틀리)와 청년 코치 조(조너선 라이 마이어스)의 우정과 사랑에 힘입어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장벽들을 하나 둘씩 넘어간다. 미국 여자프로축구 리그의 스카우터가 관전했던 최후의 결승전에서 그가 시도했던 프리킥 장면은 영화의 핵심을 단 한 컷으로 보여준다. 철통같은 수비벽을 쌓고 있는 상대선수들의 모습이 전부 그의 가족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저 수비벽을 뚫고 골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제는 단 하나뿐인 방법을 가르쳐준다. "베컴처럼 휘어서 차라!"(Bend It Like Beckham) 그가 성공시킨 통쾌한 바나나킥은 청춘의 도전이요, 장벽의 극복이며 자유의 비상이다. 이 감동적인 순간과 교차편집된 인도 전통혼례의 흥겨운 피로연 장면은 이 작지만 유쾌한 승리를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킨다. 사춘기 자녀를 둔 가족이라면 모처럼 한 자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관람하며 서로의 말문을 터나가기에 적격인 영화다.
[한겨레] 2004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