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루키의 인생역전극
배리 레빈슨 [내츄럴](1984)
따져볼수록 모든 상황은 절망적이다. 프로야구계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검은 돈과 음모들이 날뛴다. 구단을 싼 값에 인수하려는 적들은 갖은 계략들을 펼친다. 미모를 앞세운 위험한 여인 메모(킴 베이싱어)의 은근한 저주는 로이(로버트 레드퍼드)를 무력화시키고도 남을 만큼 강하다. 역전을 꿈꾸는 것은 오직 멋모르는 관객들뿐이다. 그들은 대공황기인 1930년대의 궁핍하고도 고단한 삶을 야구장에서나마 위로받고 싶다. 9회말에 타석에 들어선 로이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비록 소년시절 야구천재였다고는 하나 불의의 사고로 야구를 등졌던 그가 35살의 늙은 루키로 구장에 돌아왔을 때 그를 주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로이는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후 리그 최하위팀을 결승전까지 끌어올린다. 그의 눈부신 활약은 프로야구계의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적들은 승부조작을 강요하며 막대한 뒷돈을 그에게 건넨다. 타석에 선 그의 눈 앞엔 야구와 관련된 자신의 전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로이는 회한 가득한 자신의 생애를 단 한 방의 스윙으로 뒤집어 버리고 싶다.
야구는 9회말부터. 모든 야구광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이 관용구가 가장 아름답게 형상화된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배리 레빈슨의 [내츄럴](1984)이다. 깡! 로이가 쳐낸 야구공이 하늘을 가른다. 야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은 절망이다. 하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그것은 희망이다. 야구공은 경기장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조명탑을 강타한다. 역전 홈런이다. 이 순간 역전된 것은 야구경기만이 아니다. 곧이어 경기장의 모든 조명탑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그 황홀한 불꽃의 폭포 속을 무표정한 얼굴로 외로이 달려가는 로이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주인공 같다.
엄밀히 말하여 [내츄럴]은 신화보다는 동화에 가깝다.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동화다. 나쁘게 말하자면 모호하지만 좋게 말하자면 텍스트가 두껍다. 고상한 꿈과 더러운 현실 그리고 미약한 선과 강대한 악이 그려내는 드라마와 그 해피엔딩은 미국적 동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내츄럴]은 그래서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야구영화의 영원한 클래식이다. 제목으로 쓰인 ‘내츄럴’은 ‘자연스럽다’는 뜻과 ‘천부적 재능’이라는 뜻을 동시에 함의한다.
[한겨레] 2003년 8월 26일자